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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지우 시인 / 지복한 틈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1.

황지우 시인 / 지복한 틈

 

 

 비 오는 날이면, 아내 무릎을 베고 누워, 우리는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젤 좋아하는 노래는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는 동요이다.

 

 그  방주(方舟) 속의 권태롭고 지겨운 시절이,  이제는 이 지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지복한 틈이었다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라. 화엄(華嚴)의 넓은 세상.

  들어가도, 들어가도, 가지고 나올 게 없는

  액체의 나라.

 

  나의 오물(汚物)을 지우는, 마침내 나를 지우는 바다.

 

나는 너다, 문학과지성사, 1987

 

 


 

 

황지우 시인 / 초로(草露)와 같이

 

 

오 환생(幻生)을 꿈꾸며 새로 태어나고 싶은 물소리, 엿듣는 풀의 누선(淚腺) 살아 있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이름을 부르며 살 뿐,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로다 저 타오르는 불 속은 얼마나 고요할까 상(傷)한 촛불을 들고 그대이슬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들고 싶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황지우 시인 / 파란만장

 

 

율도국에 가고 싶다

내 흉곽의 강안(江岸)을 깎는

파란만장(波瀾萬丈)

 

물결 하나가

수만 겹의 물결을 데리고 와서

나의 애간장 다 녹이는

 

조이고 쪼이는

내 몸뚱아리 빨래가 되고

 

오 빨래처럼

시신(屍身)으로 떠내려가도

저 율도국으로 흘러가고 싶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황지우(黃芝雨, 1952 ~ ) 시인

본명은 황재우. 1972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문학활동을 시작. 1973년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강제입영 당하였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 1981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제적되어 서강대학교 대학원으로 옮겨 1985년 철학과를 졸업하였고, 1991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