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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겨울 거울 1
노을 사그라져 밤하늘
둥실 떴다 달님아
온몸에 돋아오는 새파란 별자리 옷 갈아입고 겨울 뜨락에 눕는다
마주 우러른 북두 내 모든 허물도 함께 눕는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겨울 거울 6
아침에 저녁을 배운다 대낮에는 밤을 배우고 겨울이면 여름을 배운다
배운다 겨울보리 여름에 먹고 여름쌀 겨울에 먹는 것 천지 이치를 배운다
새벽 샘물 길러 가는 날마다 아침학교에서 배운다 이차저차하는 모든 삶 줏대를 배운다 요즈막 내 공부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겨울 거울 7
천리향도 시들고 동백도 자취 없다
가슴은 마당 복판에서 두근거리고 발은 이미 문을 나선다
현수막 현수막 찢긴 포스터들 어지러운데
홀로 샘물 길러 간다 내일 마실 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겨울에
마음 산란하여 문을 여니
흰눈 가득한데 푸른 대가 겨울 견디네
사나운 짐승도 상처받으면 굴 속에 내내 웅크리는 법
아아 아직 한참 멀었다
마음만 열고 문은 닫아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결별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은빛 반짝이는 낮은 구릉을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춤추는 꽃들을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피투성이 내 청춘을 묻고 온 도시 잘 있거라 낮게 기운 판잣집 무너져 앉은 울타리마다 바람은 끝없이 펄럭거린다 황토에 찢긴 햇살들이 소리지른다 그 무엇으로도 부실 수 없는 침묵이 가득 찬 저 웨침들을 짓누르고 가슴엔 나직히 타는 통곡 닳아빠진 작업복 속에 구겨진 육신 속에 나직히 타는 이 오래고 오랜 통곡 끌 수 없는 통곡 잊음도 죽음도 끌 수 없는 이 설움의 새파란 불길 하루도 술 없이는 잠들 수 없었고 하루도 싸움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삶은 수치였다 모멸이었다 죽을 수도 없었다 남김없이 불사르고 떠나갈 대륙마저 없었다 웨치고 웨치고 짓밟히고 짓밟히고 마지막 남은 한줌의 청춘의 자랑마저 갈래갈래 찢기고 아편을 찔리운 채 무거운 낙인 아래 이윽고 잠들었다 눈빛마저 애잔한 양떼로 바뀌었다 고개를 숙여 내 초라한 그림자에 이별을 고하고 눈을 들어 이제는 차라리 낯선 곳 마을과 숲과 시뻘건 대지를 눈물로 입맞춘다 온몸을 내던져 싸워야 할 대지의 내일의 저 벌거벗은 고통들을 끌어안는다 미친 반역의 가슴 가득가득히 안겨오는 고향이여 짙은 짙은 흙 냄새여 가슴 가득히 사랑하는 사람들 아아 가장 척박한 땅에 가장 의연히 버티어 선 사람들 이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금 피투성이 쓰라린 긴 세월을 굳게 굳게 껴안으리라 잘 있거라 키 큰 미루나무 달리는 외줄기 눈부신 황톳길 따라 움직이는 숲그늘 따라 멀어져가는 도시여 잘 있거라 잘 있거라.
황토, 한얼문고,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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