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유관순(柳寬順)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1.

정호승 시인 / 유관순(柳寬順) 1

 

 

그리운 미친년 간다.

햇빛 속을 낫질하며 간다.

쫓는 놈의 그림자는 밟고 밟으며

들풀 따다 총칼 대신 나눠주며 간다.

그리움에 눈감고 쓰러진 뒤에

낫 들고 봄밤만 기다리다가

날 저문 백성들 강가에 나가

칼로 물을 베면서 함께 울며 간다.

새끼줄에 꽁꽁 묶인 기다림의 피

쫓기는 속치마에 뿌려 놓고 그리워

간다, 그리운 미친년 기어이 간다.

이 땅의 발자국마다 입맞추며 간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 유관순(柳寬順) 5

 

 

가야지.

버림받은 이 계집의 술집으로 가야지.

눈물이 끝난 사내들이 찾아오면

젓가락 두드리고 눈이 내리고

이 한몸 눈사람으로 술 마셔야지.

술잔도 없이

쫓기던 그 님 남긴 술잔도 없이

그 님 사랑보다 먼저 술 취해야지.

술집을 데리고 바다로 나가

모든 사람들의 눈물이 끝날 때까지

가야지.

술동이 머리 이고 술 팔러 가야지.

사랑이 끝난 계집들의

눈 내리는 마을은 삶보다 고요하고

술 취한 사내들이 눈길마다 아름답다.

 

슬픔이 기쁨에게, 창작과비평사, 1979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