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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신용 시인 / 자라, 서시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1.

김신용 시인 / 자라, 서시

 

 

  처음 하나의 시선이었을 때, 바닥에 떨어져 바닥과 수평이 되어 있는 하나의 시선이었을 때, 너는 세계의 부피를 겹겹이 껴입은 듯 걸어왔다. 무거운 짐을 지고 비계를 오르듯 걸어왔다.

 

  그러나 자라, 등에 무겁게 얹힌 갑피는 너의 방주, 바닥의 홍수에서 너를 건져줄 방주

 

  자라, 너는 그 두터운 보호막으로 몸을 가리는 것으로서 오늘도 하루를 견뎌낼 외투를 장만하지만, 그 등이, 슬픔이 굳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두꺼운 갑피에 덮인 등짝이 낭떠러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라, 너의 목 또한 긴 동굴에서인 듯 빠져나올 때, 누군가는 아직도 세상은 비명, 비명의 연속이라고 말하지만, 그래, 이제 노동마저 바람을 소유한 자의 것이 된 오늘, 새의 날개로 수직 비행을 할 수 있는 자의 것이 된, 오늘

 

  자라, 모든 포물선을 긋는 것들은 되돌아오는 길을 가졌다. 환상(環狀)의 무늬 같은, 되돌아오는 길을 가졌다. 그것은 발보다 머리가 더 무겁기 때문, 사유가 언제나 무덤이 되기 때문

 

  그래, 생각하지 말 걸 그랬다. 네가 벌통 속에서 어떻게 꿀을 훔쳤는 지를, 아이들을 위해, 나비의 날개에서 어떻게 꽃가루를 훔쳤는 지를, 그래, 상상하지 말 걸 그랬다. 등에 무거운 갑피를 얹고, 비계를 오르듯 한 발 한 발 걷는 것으로서 한 생(生)의 업을 삼았으면, 낭떠러지가 된 척추가 기둥이 되어주었을 것을. 벼랑이 된 척추 위에 너와, 너와집을 짓고 바람을 소유했을 것을

 

  그러나 자라, 내 심장이 돌이 아니어서 무겁게 눈을 감은 오늘, 너는 오늘도 어두운 동굴에서인 듯 걸어 나온다. 걸어 나와, 꽃 한 송이를 내민다.

 

  바닥과 수평으로 만들어 주는, 꽃 한 송이

  그렇게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인, 꽃 한 송이

 

월간 『현대시학』 2013년 4월호 발표

 

 


 

김신용 시인

1945년 부산에서 출생. 1988년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버려진 사람들』(1988), 『개 같은 날들의 기록』(1990), 『몽유 속을 걷다』(1998), 『환상통』(2005), 『도장골 시편』 (2007),  『바자울에 기대다』(2011), 『잉어』(2013) 등과 장편소설『달은 어디에 있나 1,2』『기계 앵무새』 (1997), ‘『달은 어디에 있나 1. 2』 <고백을 이 제목으로 재출간> (2003), 『새를 아세요?』(2014)  등이 있음.  2005년 제7회 천상병문학상과 2006년 제6회 노작문학상,  2013년 제6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과 같은 해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주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