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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소리꾼
저 강과 바다를, 산맥(山脈)을 햇볕이 쨍쨍한 들판을 선무당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다 삼백예순날 처처를 돌면서 맺힌 한을 서편(西便)에 실어서, 찢고 찢어 배앝으는 붉은 피로, 너의 마음을 부른다 고수(鼓手)야 슬픈 고수(鼓手)야
노래가 임당수 물을 가르고 저승의 강바람에 밀리고 밀리다 스러질지라도 북소리 고르게 높여라 우리는 센 물살을 거슬러 천년이고 백년이고 흘러가야 한다
저 들판의 붉은 노을과 갑오년(甲午年)에도 들녘에 고웁게 핀 진달래 우리 마음의 이 울한과 나라도 없는 계집들의 음심을, 자식도 부모도 버리고 도망간 비오는 골목의 네 계집처럼, 고수(鼓手)야 슬픈 고수(鼓手)야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시(詩)
비 내리는 날은 모두가 허깨비 허깨비
그녀가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서양 여자들처럼 도전적인 걸음으로 다가와도 비 내리는 날은 이미 모두가 비이고 죽음이다 지나온 시간들이 멀리 멀리에서 아우성치며 손을 내밀어도 시간들은 이미 죽음이고 추억일 뿐이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세계여 나는 이제 네 앞에 서서 얼굴을 비춰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본질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구겨지고 짓이겨지고 뒤죽박죽되어 시간 속에서 시간꽃이 된다
세계여 나의 시는 이제 비 맞은 나무 비 맞은 새 비 맞은 들녘
이런 시를 쓰면서 제법 나는 시인인 체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엿먹어라, 지금은, 가을, 대지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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