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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소리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1.

최하림 시인 / 소리꾼

 

 

저 강과 바다를, 산맥(山脈)을

햇볕이 쨍쨍한 들판을

선무당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다

삼백예순날 처처를 돌면서

맺힌 한을 서편(西便)에 실어서,

찢고 찢어 배앝으는 붉은 피로,

너의 마음을 부른다 고수(鼓手)야 슬픈 고수(鼓手)야

 

노래가 임당수 물을 가르고

저승의 강바람에 밀리고

밀리다 스러질지라도

북소리 고르게 높여라

우리는 센 물살을 거슬러

천년이고 백년이고

흘러가야 한다

 

저 들판의 붉은 노을과

갑오년(甲午年)에도 들녘에 고웁게 핀 진달래

우리 마음의 이 울한과 나라도 없는

계집들의 음심을, 자식도

부모도 버리고 도망간

비오는 골목의 네 계집처럼,

고수(鼓手)야 슬픈 고수(鼓手)야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시(詩)

 

 

비 내리는 날은 모두가 허깨비 허깨비

 

그녀가 푸른 스카프를 두르고 이상한 모자를 쓰고 서양 여자들처럼 도전적인 걸음으로 다가와도 비 내리는 날은 이미 모두가 비이고 죽음이다 지나온 시간들이 멀리 멀리에서 아우성치며 손을 내밀어도 시간들은 이미 죽음이고 추억일 뿐이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세계여 나는 이제 네 앞에 서서 얼굴을 비춰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본질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구겨지고 짓이겨지고 뒤죽박죽되어 시간 속에서 시간꽃이 된다

 

세계여 나의 시는 이제 비 맞은 나무 비 맞은 새 비 맞은 들녘

 

이런 시를 쓰면서 제법 나는 시인인 체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엿먹어라, 지금은, 가을, 대지에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