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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결핍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

김지하 시인 / 결핍

 

 

쥐었다 폈다

두 손을 매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무엇이든 동그랗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은

공,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귤,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 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하얀 옛 항아리, 그저 둥근 원

그리고

애린

네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기 때문에.

찬 것

모난 것

딱딱한 것 녹슨 것

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

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

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

애린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동그래져

애린

네 얼굴을 그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보드라워져

애린

네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해맑아져

애린

그러나 이제

아무리 부르려 해도

아무리 아무리 그리려 해도

떠올리려 해도

안돼

그게 안돼

모두 다 잘 안돼

쥐었다 폈다

두 손을 온종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고사목

 

 

고목에 기대 서서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서서만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설 때만

고목을 생각하자

불타 죽은 나무

나무의 혼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

 

 

단 한 번 울고 가

자취 없는 새

그리도 가슴 설렐 줄이야

단 한 순간 빛났다

사라져가는 아침빛이며

눈부신 그 이슬

그리도 가슴 벅찰 줄이야

한때

내 너를 단 하루뿐

단 한 시간뿐

진실되이 사랑하지 않았건만

이리도 긴 세월

내 마음 길 양식으로 남을 줄이야

애린

두 눈도 두 손 다 잘리고

이젠 두 발 모두 잘려 없는 쓰레기

이 쓰레기에서 돋는 것

분홍빛 새살로 무심결 돋아오는

애린

애린

애린아.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4

 

 

외롭다

이 말 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란 해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질 것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진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 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6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대답이 느리다

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

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보는

내 눈자위에 걸린 머얼건

저 낮달

한낮 이 머얼건 쪼각달.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8

 

 

버들잎 타고

천리를 흘러와

무에 좋아서 이러는가

어쩌다 스스로 또 귀양살인가

차차 눈 침침해가는 이 나이에

해남 남동 남녘 끝까지 흘러 흘러와.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