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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결핍
쥐었다 폈다 두 손을 매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무엇이든 동그랗고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무엇이든 가볍고 밝고 작고 해맑은 공, 풍선, 비눗방울, 능금, 은행, 귤, 수국, 함박, 수박, 참외, 솜사탕, 뭉게구름, 고양이 허리, 애기 턱, 아가씨들 엉덩이, 하얀 옛 항아리, 그저 둥근 원 그리고 애린 네 작고 보드라운 젖가슴을 만지고 싶기 때문에. 찬 것 모난 것 딱딱한 것 녹슨 것 낡고 썩고 삭아지는 것뿐 이곳은 온통 그런 것들뿐 내 마음마저 녹슬고 모가 났어 애린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동그래져 애린 네 얼굴을 그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보드라워져 애린 네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해맑아져 애린 그러나 이제 아무리 부르려 해도 아무리 아무리 그리려 해도 떠올리려 해도 난 안돼 그게 안돼 모두 다 잘 안돼 쥐었다 폈다 두 손을 온종일 움직이는 건 벽 위에 허공에 마룻장에 자꾸만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대구 그려쌓는 건 알겠니 애린.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고사목
고목에 기대 서서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서서만 고목을 생각하자 고목에 기대 설 때만 고목을 생각하자 불타 죽은 나무 나무의 혼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1
단 한 번 울고 가 자취 없는 새 그리도 가슴 설렐 줄이야 단 한 순간 빛났다 사라져가는 아침빛이며 눈부신 그 이슬 그리도 가슴 벅찰 줄이야 한때 내 너를 단 하루뿐 단 한 시간뿐 진실되이 사랑하지 않았건만 이리도 긴 세월 내 마음 길 양식으로 남을 줄이야 애린 두 눈도 두 손 다 잘리고 이젠 두 발 모두 잘려 없는 쓰레기 이 쓰레기에서 돋는 것 분홍빛 새살로 무심결 돋아오는 애린 애린 애린아.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4
외롭다 이 말 한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란 해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질 것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진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 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6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대답이 느리다 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 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보는 내 눈자위에 걸린 머얼건 저 낮달 한낮 이 머얼건 쪼각달.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그 소, 애린 8
버들잎 타고 천리를 흘러와 무에 좋아서 이러는가 어쩌다 스스로 또 귀양살인가 차차 눈 침침해가는 이 나이에 해남 남동 남녘 끝까지 흘러 흘러와.
애린2, 실천문학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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