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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 저승꽃
어느 노옹(老翁)의 벽에서였던가 수묵색으로 떠 오른 수락산 비탈길을 고깔 쓴 늙은 비구니 하나가 오르고 있었다. 수락산 아래 적막한 들길에도 난향(蘭香)이 그윽하였다. 뒷짐지고 올라 가는 그 여승의 발걸음에도 무릿돌들이 굴러 내리며 맑은 향 그득하니 퍼졌다. 사람이 오래 살면 몸에서도 절인 향기가 저렇듯 온 들판 하나를 다 적시는 것일까.
또 한번은 소월시문학상 식전에서 박두진(朴斗鎭)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조브장한 어깨를 배경으로 이마와 얼굴에 올라 붙은 살이 주름살로 영글고 그것들은 잘 마른 가죽끈처럼 절로 소리 울려 올 듯했다. 북을 메었으면 저 가죽끈으로 두루두루 우리 산천 잘 울리는 북을 메었으면…… 아니 검은 돌에 새겨진 그것은 몇 가닥의 무늬석이었다. 아니 그것은 잘 피어가는 저승꽃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승꽃에서도 향기가 나다니! 꼬장한 키가 우리집 앞, 해마다 수도 없이 많은 대추알을 떨구고 선 그 대추나무였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면 깡마른 치수에서도 물에 젖은 참귀목 같은 향이 저어나는 것일까
저승꽃이 만발한 이 세상 많은 꽃 중에서 얼굴과 얼굴이 스쳐 이루는 모진 세상, 아들아 너는 이 다음에 크면 네 선 자리가 바로 그 저승꽃자린 줄 알고 이 세상 온갖 말들이 바로 그 저승새의 서러운 울음인 것을 알아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전설(傳說)
바닷가 오두막집에 늙은 양주 내외 살았다. 옛날에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풀고 옛날에 영감은 망치집이 쉬지 않고 불꽃을 쳤다 낮과 밤을 이어 끝없는 노동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 타는 불 보고 불 같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먼 데 있는 도시의 집들을 꿈꾸고 망치야 날아라 망치야 날아라 새들처럼 가볍게 떠가는 꿈을 꾸었다 폭풍이 치고 온 산과 들 바다에 쿠렁쿠렁 망치소리 울릴 때
길 잃은 배들이 망가진 닻을 풀고 고개 너머 마을 사람들이 연장과 도구를 찾아 갔다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불고 영감은 모루 위에서 쇠집게로 물통 속에 불을 던졌다 물과 불이 만나 싸늘하게 식은 쇳덩이를 토해 내고 이제 우리는 알았다 그것들이 맹수처럼 덤벼 들어서 어떻게 우리를 사냥하고 물어뜯는가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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