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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겸 시인 / 청실홍실 대천바다
도서관에서 취업공부 하다가 학보사 후배들 MT에 따라갔던 대천 바다가 어항에서 산 가오리 한 마리를 회로 떠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던 대천 바다가 수영복을 입은 후배 여기자가 체육학과 교수로부터 체형의 칭찬을 받았던 대천 바다가 기억에서 멀어졌을 때
연구소에 취직을 한 내가 몇 년 만에 학보사 선배모임에 갔더니 체형이 아름다웠던 후배가 다가와 반갑게 웃더니 저, 선배님을 어제 밤 꿈속에서 봤어요 나도 짐짓 놀란 제스처로 웃으며 꿈속에서 만나 뭘 했는데 농담하니 아이 몰라요 목까지 내려온 홍조가 장미처럼 붉었기에 그 꿈의 내용이 궁굼 했으나 서로 웃고 흘려보낸 청실홍실의 기억에서 데면데면한 사이었기에 후배 여기자 무의식의 전이(轉移)와 환상의 주제가 궁굼했던 청실홍실의 기억에서 남자를 만난 여자의 부끄러움과 홍조란 섹스의 말없는 초대라는 심리학자의 분석을 나중에 보고 무의식의 기억이 추억의 환한 무대로 걸어 나왔던 청실홍실의 기억에서
생각해보니 비리비리한 프롤레타리아 서생이 금수저 후배에게 프로포즈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청실홍실의 기억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배가 전문대학 교수로 취직 후 결혼했다가 암으로 일찍 죽은 소식을 나중에 듣고 인생이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Moirai)가 어떤 각본을 짜는지 모르는 희극이라고 생각한 청실홍실의 기억에서 그 후배와 인연이 닿았더라면 인생의 위기- 중년 상처(喪妻)로 운명이 바뀌었을 청실홍실의 기억에서
30년 후 모텔과 호텔들이 정글처럼 들어서 추억이 길을 양보해야 하는 변신의 대천 해변에서 대천 항으로 이어지는 올레 길을 홀로 걸어갔지 바람에 불꽃처럼 흔들리는 어두운 측백나무들이 죽음의 푸른 향기를 뿜어내는 올레길을 걸어갔지 수평선에 죽음이 거북이 등처럼 웅크리고 있는 올레길을 걸어갔지 심해에 사는 검은 가오리가 자맥질을 하며 지나가자 천문(天文)과 은현(隱現)의 만경창파가 몰려가고 있는 올레길을 걸어갔지
바닷가에는 시절 인연이 낡은 버스를 타고 왔던 방황의 기쁨과 커피를 마시던 해변의 포장마차는 사라지고 없었네 바닷가에는 흰 코끼리가 구름의 숲을 지나가고 철탑 전신주의 고압선들이 연극무대의 배경처럼 서 있었네 바닷가에는 학익진(鶴翼陣)을 펼친 기억들이 푸르고 붉은 비단 스카프를 영화장면처럼 흔들고 있었네 바닷가에는 바닷가를 같이 걸었던 사람들의 이름들이 바다가 보낸 큰 파도에 밀려 다가오고 있었네 바닷가에는 청춘의 환상이 바람 앞에 위태로운 촛불처럼 타고 있었네
저녁이 7개의 베일이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쳤는데 노을이 살로메의 춤처럼 붉은 유혹으로 다가 왔던 대천해변 만경창파(萬頃蒼波)에 뜬 장미꽃들이 빅 데이터의 파편처럼 빛나는 순간을 보여주었던 대천 해변 우주의 마야(maya) 연극 속에서 운수납자(雲水納子)가 해인(海印)을 보고 기쁨을 느꼈던 대천 해변 은퇴백수의 심혼(心魂)이 시간의 검고 푸른 바다를 헤엄쳐 온 검은 가오리였음을 깨달았던 대천 해변
무크 년간지 『데전의 시인들』2019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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