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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수권 시인 / 풍장(風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5.

송수권 시인 / 풍장(風葬)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도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 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

입으로 불어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서 웬수 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인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 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한국의 강(江)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돌무지에서도 어린 느티나무 싹이 자라듯

처음은 가느다란 가느다란 풀무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귀또리 울음처럼 잎을 달고 제 날기뼈를 쳐서

저 깊은 골짝으로 막 밀어낼 때는, 가지는 휘늘어져

검은 구렁이처럼 운다. 이제는 융융하다 소리가 없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한밤중 그것들은 저 벌판,

늑대들처럼 몰려 서서 짖는다. 어떤 창이 와도 이 옆구리

찌를 수 없고 어떤 대포알이 와도 이 심장 죽일 수 없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창창한 어린 잎을 달고서는 계룡산 연봉을 보며

우쭐거리던 처녀시절 ― 부여(扶餘), 참 좋은 숲 하나를 이루었다.

백마를 타고 강폭을 미끄러지던 범선의 돛대를 향하여

화살을 날리는 꿈 같던 백제의 청년은 죽었다.

시들해지고 그후 밑뿌리까지 다 보일 듯하더니

강경에 이르러 장꾼들의 멸치젓 새우젓 어리굴젓 독에서도

왁자지껄 진딧물 같은 물벼룩들이 툭 툭 떨어진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그것들은 모이고 오여 밑둥까지 꺼머진 채 숲을 이루며

어깨와 팔다리의 근육을 우그려뜨려서는 금산사의 미륵보살

흰 눈썹에도 어진 손 얹고 지나가는 것을, 그러고도

논산 제2훈련소 앞을 서서남으로 빗밋이 에두르고

휘두르다가는 이제는 그 숲속에서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에 얼려 이제는 더 어쩔 수 없이

전라도 사투리가 열매들처럼 툭 툭 불거진다.

 

아, 저 보아라 저무는 강둑 착한, 젖먹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 서해 짠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들어가 이제는 멸치떼고

세우떼고 마구 퍼 올리는 한국의 강을, 저

이끼 슬은 관촉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러고도

이 벌판 가득 떠 오르는 저 찬란한 별들을.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宋秀權, 1940.3.15 ~ 2016.4.4]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호는 평전(平田).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제1시집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문학사상), 제2시집 『꿈꾸는 섬』(1982. 문학과지성사), 제3시집 『아도(亞陶)』(1985. 창작과비평사), 제4시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동학서사집)』(1986. 나남), 제5시집 『우리들의 땅』(1988. 문학사상), 제6시집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전원), 제7시집 『별밤지기』(1992. 시와시학사), 제8시집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1994. 문학사상), 제9시집 『수저통에 비치는 노을』 (1998. 시와시학사), 제10

시집 『파천무』(2001. 문학과경계사), 제11시집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학사), 제12시집 장편서사시 『달궁 아리랑』(2010. 종려나무), 제13시집 『하늘을 나는 자전거』, 제14집 『빨치산』 등이 있음.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제1회 영랑시문학상(2003), 김달진 문학상, 서라벌문학상 등을 수상.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