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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시인 / 풍장(風葬)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도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 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 입으로 불어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서 웬수 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인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 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송수권 시인 / 한국의 강(江)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돌무지에서도 어린 느티나무 싹이 자라듯 처음은 가느다란 가느다란 풀무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귀또리 울음처럼 잎을 달고 제 날기뼈를 쳐서 저 깊은 골짝으로 막 밀어낼 때는, 가지는 휘늘어져 검은 구렁이처럼 운다. 이제는 융융하다 소리가 없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한밤중 그것들은 저 벌판, 늑대들처럼 몰려 서서 짖는다. 어떤 창이 와도 이 옆구리 찌를 수 없고 어떤 대포알이 와도 이 심장 죽일 수 없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창창한 어린 잎을 달고서는 계룡산 연봉을 보며 우쭐거리던 처녀시절 ― 부여(扶餘), 참 좋은 숲 하나를 이루었다. 백마를 타고 강폭을 미끄러지던 범선의 돛대를 향하여 화살을 날리는 꿈 같던 백제의 청년은 죽었다. 시들해지고 그후 밑뿌리까지 다 보일 듯하더니 강경에 이르러 장꾼들의 멸치젓 새우젓 어리굴젓 독에서도 왁자지껄 진딧물 같은 물벼룩들이 툭 툭 떨어진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그것들은 모이고 오여 밑둥까지 꺼머진 채 숲을 이루며 어깨와 팔다리의 근육을 우그려뜨려서는 금산사의 미륵보살 흰 눈썹에도 어진 손 얹고 지나가는 것을, 그러고도 논산 제2훈련소 앞을 서서남으로 빗밋이 에두르고 휘두르다가는 이제는 그 숲속에서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에 얼려 이제는 더 어쩔 수 없이 전라도 사투리가 열매들처럼 툭 툭 불거진다.
아, 저 보아라 저무는 강둑 착한, 젖먹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 서해 짠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들어가 이제는 멸치떼고 세우떼고 마구 퍼 올리는 한국의 강을, 저 이끼 슬은 관촉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러고도 이 벌판 가득 떠 오르는 저 찬란한 별들을.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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