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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잔칫날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5.

신경림 시인 / 잔칫날

 

 

아침부터 당숙은 주정을 한다

차일 위에 덮이는 스산한 나뭇잎.

아낙네들은 뒤울안에 엉겨 수선을 떨고

새색시는 신랑 자랑에 신명이 났다.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날을 잊었느냐고.

저 얼빠진 소리에 귀 기울여 뭣하랴.

마침내 차일 밑은 잔칫집답게 흥청대어

새색시는 시집 자랑에 신명이 났다.

트럭이 와서 바깥 마당에 멎었는데도

잊었느냐고, 당숙은 주정을 한다.

네 아버지가 죽던 꼴을 잊었느냐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장자(莊子)*를 빌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장자(莊子)』 추수편(秋水篇)에 `대지관어원근(大知觀於遠近)'이라는 글귀가 있음.

 

길, 창작과비평사, 1990

 

 


 

 

신경림 시인 / 전야(前夜)

 

 

그들의 함성을 듣는다

울부짖음을 듣는다

피맺힌 손톱으로

벽을 긁는 소리를 듣는다

누가 가난하고

억울한 자의 편인가

그것을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달려 가는 그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쓰러지고 엎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죽음을 덮는

무력한 사내들의 한숨

그 위에 쏟아지는 성난

채찍소리를 듣는다

노랫소리를 듣는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