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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호승 시인 / 휴전선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6.

정호승 시인 / 휴전선에서

 

 

하늘이 무너질 때까지 너를 기다렸다

눈부시게 밝은 햇살 아래 엎드려

하늘이 무너지고 눈이 내릴 때까지

너를 사랑했다

 

눈물 없이 꽃을 바라볼 수 없고

눈물 없이 별들을 바라볼 수 없어

흩어졌던 산안개가 다시 흩어질 때까지

죽어서 사는 길만 걸어서 왔다

 

녹슨 철조망 사이로

청둥오리떼들은 말없이 날아갔다 돌아오고

산과 산은 이어지고

강과 강은 흘러 흘러

 

누가 내 가슴속

푸른 하늘을 빼앗아갔을지라도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별들을 조용히 흔들어보았다

 

별들은 따뜻하다, 창작과비평사, 1990

 

 


 

 

정호승 시인 /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어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둔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그리움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울의 예수, 민음사, 1982

 

 


 

 

정호승 시인

1950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새벽편지》 등이, 시선집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흔들리지 않는 갈대》 등이, 어른이 읽는 동화로 《연인》《항아리》《모닥불》《기차 이야기》 등이, 산문집 《소년부처》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