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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예강 시인 / 흰죽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6.

김예강 시인 / 흰죽

 

 

  이 빛 속에 들면 좁다랗고 투명한 긴 잎사귀를 단 나무가 되기도

  핏덩이를 갓 받아 품에 들이는 어미가 되기도

  그를 내어 숨을 불어넣는

  죽이 비로소 되는

 

  눈 감은 자들이 보여주는 소리들

  아기를 삼키고 내는 천상의 소리들

  한 소리를 잡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빛

  물이 되기도 바람이 되기도 하는

 

  죽 한 숟가락을 떠넘길 수 있기까지

  마음이 씹어 넘기는 양식이 되기까지

 

  눈 덮인 지붕 아래 잠든 길들이 언어를 잃기 시작한다

  지붕은 기억들이 읽고 버린 온기들이 소복이 쌓인다

 

  두드린 문이 조금씩 열렸지만 바람은 열린 문을 다시 닫아버린다

  삐걱대다 닫힌 문은 비장한 손에 거머쥔 운명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집에 가는 길

  흰여울 길을 지난다

 

  연일 이어지는 대설주의보

 

  휘저은 죽,

  연일 길은 갸르릉 거린다 그러나 돌아가야 할 집,

  집에 닿기까지,

  이 폭설을 다 맞는다

 

계간 『시와 세계』 2019년 가을호 발표

 

 


 

김예강 시인

부산교육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5년《시와 사상》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의 잠』(작가세계,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과 계간 『시와 사상』 편집장 역임. 현재 계간 『시와 사상』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