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바람에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6.

김지하 시인 / 바람에게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바램 1

 

 

다시금 칼을 뽑을 땐

칼날이여

연꽃이 되라

 

죽을 싸움 싸우다 죽어

피투성이 피투성일지라도

손에 쥔 것은 칼이 아닌

연꽃이 되라

연꽃이 되라

 

반쪽만 남은 돌미륵

모로 누운 채 잠든 내

주검 곁에서 웃어라

너는 크게 웃어라

 

아아아

이 커다란 품.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밤나라

 

 

밤은 소리들의 나라

보드라운 날카로운 엷고 때론 아득히

공고한 것이여 높고 낮은

울렁임 가득히 영글어가는 귀한 것이여

밤은 불멸의

아 저 숱한 소리들의 나라

 

온갖 것 다 살아 춤추어서 애틋하여라

그지없어라 가없어라

이슬에 깨어

깨어 어디에도 이를 곳 없이 떠나

쇠북에 떠나 다시는

흰 이마 위 저 고운 샘물 소리론 죽음 후에도

넋이라도 못 올 나라

아아 밤나라

 

분홍빛 작은 아기의 발

샘물 위에 춤추던 사뿐거리던 네 가벼운

소리에마저 입맞춤도 이제는 찌는 낮

고요 때문이어라

목마름 때문이어라

미친 듯 홀로 외치다 죽을 운명 때문이어라.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백방 1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여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 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어느 나무에

어느 나무 그늘에

그 사연 새겨졌는가

내 이제 짧은 머리

짧은 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서서

홀로

잿빛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긴 왜 이제 항구가 아니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백방 2

 

 

하얀 방에 누웠네

내 누구를 원망하랴

하얀 방에 누웠네

내 이제 와서 누구를 기다리랴

저 형광등 소리

저 형광등 타는 소리

빛깔이 아닌

빛깔이 아닌

흰 빛깔이 아닌

가래 타는 소리

곁에 하나만 있다면

곁에 하나의 휴지통만 있다면

내 누구를 원망하랴

더 무엇을 그리워하랴

어차피 죽어가는 것을

그리고 가래를 뱉고 난 뒤

어차피 난 일어서 이 자리를 떠날 것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백방 10

 

 

뒷숲에선 바람이 불어요

바람 속에선 뒷숲이 내게 와요

가까이 늘 밤마다

뒷숲속에

홈 패인 자국

자국 있는 샘물

샘 곁에 남겨진 끊어진 두레박

아 오세요

두레박 속에서 오세요

그날의 창도 버리고

그날의 핏발 선 눈도 버리고

오세요

뒤꼍 바람을 타고

웃음으로라도 오세요

머리 끝 흩날리는

바람으로라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