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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바람에게
내게서 이제 다 떠나갔네 옛날 훗날도 먼 곳으로 홀가분하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남은 것은 겉머리 속머리 가끔 쑤시는 짜증뿐 빈 가슴 스쳐 지나는 윗녘 아랫녘 바람 소리뿐
내게서 더는 바랄 것 없네 버리려 떠나 보내려 그토록 애태웠으니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바랄 것은 몹시도 시장한 중에 눈 밝혀 찾아 먹는 밥 한 그릇 배부르면 배 두드려 대중없이 부르는 밥노래 한 가락뿐
춘란 뽑혀 멀리 팔려간 티끌 이는 길섶 못생긴 여뀌닢여뀌 잎으로 잔뜩 비틀어져 내 다시 났으니 바람아 내 잎새에 와 무심결에 새 햇살로 흔들려라.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바램 1
내 다시금 칼을 뽑을 땐 칼날이여 연꽃이 되라
죽을 싸움 싸우다 죽어 피투성이 피투성일지라도 손에 쥔 것은 칼이 아닌 연꽃이 되라 연꽃이 되라
반쪽만 남은 돌미륵 모로 누운 채 잠든 내 주검 곁에서 웃어라 너는 크게 웃어라
아아아 이 커다란 품.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밤나라
밤은 소리들의 나라 보드라운 날카로운 엷고 때론 아득히 공고한 것이여 높고 낮은 울렁임 가득히 영글어가는 귀한 것이여 밤은 불멸의 아 저 숱한 소리들의 나라
온갖 것 다 살아 춤추어서 애틋하여라 그지없어라 가없어라 이슬에 깨어 깨어 어디에도 이를 곳 없이 떠나 쇠북에 떠나 다시는 흰 이마 위 저 고운 샘물 소리론 죽음 후에도 넋이라도 못 올 나라 아아 밤나라
분홍빛 작은 아기의 발 샘물 위에 춤추던 사뿐거리던 네 가벼운 소리에마저 입맞춤도 이제는 찌는 낮 고요 때문이어라 목마름 때문이어라 미친 듯 홀로 외치다 죽을 운명 때문이어라.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백방 1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백방산 나가미 위에 무수히 서 있는 저 여인들의 얼굴 얼굴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저 무수히 바람에 갇혀 옹송거리는 어깨 움직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여기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이리 떠나고 떠나오던 그 숱한 작별의 이야기들을 누가 백방이라 하였는가 어느 나무에 어느 나무 그늘에 그 사연 새겨졌는가 내 이제 짧은 머리 짧은 바지 차림으로 이 자리에 서서 홀로 잿빛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긴 왜 이제 항구가 아니냐.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백방 2
하얀 방에 누웠네 내 누구를 원망하랴 하얀 방에 누웠네 내 이제 와서 누구를 기다리랴 저 형광등 소리 저 형광등 타는 소리 빛깔이 아닌 빛깔이 아닌 흰 빛깔이 아닌 가래 타는 소리 곁에 하나만 있다면 곁에 하나의 휴지통만 있다면 내 누구를 원망하랴 더 무엇을 그리워하랴 어차피 죽어가는 것을 그리고 가래를 뱉고 난 뒤 어차피 난 일어서 이 자리를 떠날 것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김지하 시인 / 백방 10
뒷숲에선 바람이 불어요 바람 속에선 뒷숲이 내게 와요 가까이 늘 밤마다 뒷숲속에 홈 패인 자국 자국 있는 샘물 샘 곁에 남겨진 끊어진 두레박 아 오세요 두레박 속에서 오세요 그날의 창도 버리고 그날의 핏발 선 눈도 버리고 오세요 뒤꼍 바람을 타고 웃음으로라도 오세요 머리 끝 흩날리는 바람으로라도.
价본ê 하얀방, 분도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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