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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시인 / 우리들은 오늘도
우리들은 희망이었고 우리들은 비명이었지 우리들은 전사였고 우리들은 사도였지 우리들은 피였고 우리들은 시체였지 우리들은 빛고을이었고 빛고을의 망월동이었고 우리들은 플라타너스였고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피어나는 금남로의 벽돌짝이었지 해 저물어 어둠을 찾아들 때, 바리케이트 너머로 하나, 둘 모여드는 피투성이 된 붉고붉은 입술들 입술들의 입맞춤 입맞춤의 환희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들의 꿈이 살아난 우리들은 한마당이었지 합창이었지……광주였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 시인 /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기억들은 행복하다 우리들이 걸었던 길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아침마다 눈부신 햇덩이로 솟아오르고, 이슬을 털고 바지런한 애인들이 길을 가고, 농부들이 간다 빛을 뿜어라 떵떵 울려라 더욱 높이 사랑의 새들이 오르고 푸른 풀잎에서 이슬이 떨어지고 애인들이 순간 걸음을 멈칫한다 그러면 들판의 그림자들이 감싸듯이 그들을 가린다 그러나 떨어질 것들은 결국 떨어지고 만다 애인들은 처음의 맹세를 거두고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어둠 잠긴 참혹한 많은 시간들이 그들을 할퀴고 간다 이제 나는 가야 한다 떨린 어깨를 두팔로 감싸며 내가 걸어온 길의 붉은 노을과 내장을 꺼내 놓은 것 같은 생생한 황토밭 고속도로 추운 나무들 마을들 나는 내 거울에 입술을 대고 내 손으로 나를 만져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저녁 창가에서 반쯤 문 열고 스웨터 입고 나는 저물어가는 하늘을 봐야 한다 나는 가야 한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지 않았듯이 이제 나는 빛 속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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