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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제삿날 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6.

신경림 시인 / 제삿날 밤

 

 

나는 죽은 당숙의 이름을 모른다.

구죽죽이 겨울 비가 내리는 제삿날 밤

할일 없는 집안 젊은이들은

초저녁부터 군불 지핀 건넌방에 모여

갑오를 떼고 장기를 두고.

남폿불을 단 툇마루에서는

녹두를 가는 맷돌 소리.

두루마기 자락에 풀 비린내를 묻힌

먼 마을에서 아저씨들이 오면

우리는 칸데라를 들고 나가

지붕을 뒤져 참새를 잡는다.

이 답답한 가슴에 구죽죽이

겨울비가 내리는 당숙의 제삿날 밤.

울분 속에서 짧은 젊음을 보낸

그 당숙의 이름을 나는 모르고.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진드기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드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먹고 자고 뒹구는 이 자리가

몸까지 뼛속까지 썩고 병들게 하는

시궁창인 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짐짓 따스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자리가

암캐의 겨드랑이나 돼지의

사타구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음습한 그곳에 끼고 박힌 진드기처럼

털과 살갗의 따스함과 부드러움에 길들여져

우리는 그날 그날을 너무 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큼한 냄새와 떫은 맛에 취해

너무 편하게 살려고만 드는 것은 아닌가,

암캐나 돼지가 타 죽는 날

활활 타는 큰 불길 속에 던져져

함께 타 죽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서.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 찔레꽃

 

 

아카샤 꽃냄새가 진한 과수원 샛길을

처녀애들이 기운없이 걷고 있었다

먼지가 켜로 앉은 이파리 사이로

멀리 실공장이 보이고 행진곡이 들리고

기름과 오물로 더럽혀진 냇물에서

아이들이 병든 고기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한 그루 찔레꽃을 찾고 있었다

가라앉은 어둠 번지는 종소리

보리 팬 언덕 그 소녀를 찾고 있었다

보도는 불을 뿜고 가뭄은 목을 태워

마주치면 사람들은 눈길을 피했다

겨울은 아직 멀다지만 죽음은 다가오고

플라타나스도 미류나무도 누렇게 썩었다

늙은이들은 잘린 느티나무에 붙어앉아

깊고 지친 기침들을 하는데

오직 한 그루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냇가 허물어진 방죽 아래 숨어 서서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욱을 울고 있었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