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환 시인 / 넋 걷는 노래
그대가 날 세웠던 것은 한낱 증오의 비수가 아닙니다 그대가 이를 악물며 가른 것은 한낱 육신의 배때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입니다 바다입니다 온 산, 온 언덕이 허물어지는 한갓 사랑의 어깨의 출렁임보다도 깊은 온 세상, 쓰러짐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지기도 전에 나는 그대의 쓰러짐 위로 와아 와아 분연히 일어서는 번득여대는 사랑의 칼솜씨를 봅니다 찢어진 하늘에서 별이 무수히 쏟아져내립니다 그대의 숙연한 죽음 앞에서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이 환히 보입니다 그대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살아 있음을 더욱더 살아 있게 하였습니다. 그대의 찢어짐으로 함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모입니다 그대의 죽음 위로 살아 있는 것들이 더욱 살아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찢어진 하늘에서 바다에서 이제는 아주 잘 보이는 상처를 꿰맨 아픔들이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좋은 꽃, 민음사, 1985
김정환 시인 / 노동자의 벗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던 독재자가 있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는 것은 독재자가 아니지만 애시당초 모순은 그에게 있지만 또한 우리의 정신에도 있었다 자본의 논리는 자본가의 논리보다 더 참혹하다 정치에서는 더욱 물러간 것은 박정희지 군사독재가 아니며 사망한 것은 이병철이지 삼성 재벌이 아니다 독재자에게는 물러날 자유가 없고 재벌에게는 사망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돌연 사망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 또한 돌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발전은 독재자의 업적이 아니듯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유물론에서 예외가 아니다 시골도 타락할 권리가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어느 작가의 말은 최소한 농촌공동체만큼 체념적이되, 현실적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을 보지 못했으므로 자유를 보지 못했고 자유가 없는 권리란 환상이므로 왈 타락한 자유는 별들의 고향에서 수음으로 끝났다 참상을 봤으되 자본주의를 놓쳤고 자본주의를 봤으되 참상을 놓쳤다 둘 다 보지 못한 것은 노동자 계급 둘 다 본 것은 안방을 석권하는 텔레비전 뉴스였고 드라마였다 이제 노동자 계급을 보자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우린 무엇보다 우리가 이룩한 세상 속에 있다 흑백이 칼라로 바뀌고 재벌이 동남아로 진출하고 디스코 리듬이 착취와 노동요를 대치했건만 지금 노동자 계급을 팔아 노동자 계급으로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자는 자는 노동자의 벗인가 자본의 죄악을 빙자 죄악으로써 기계문명의 사회구성체를 부인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를 부인하는 지금 청년학도가 노도처럼 일어서고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독재자의 말을 기대하는 자는 노동자의 벗인가 아니다 우리는 봉건주의자가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완성된 부르조아지의 민주주의보다 높다 반공 드라마 전에 방송 기재가 방송 기재 전에 우리가, 있었다 돌연한 것은 주관적일 뿐이다
기차에 대하여, 창작과비평사, 1990
김정환 시인 / 눈물노래 1
그대는 어느새 혹시 그대도 모르게 외딴 들에 서서 그대의 육체는 그대의 설움은 혹시 내가 눈치 못 챈 사이에 세상의 고통을 더 안쓰러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 텅 비인 분노로 활활 껴안으면 그대도 또한 활활 타올라 뼈도 못 추리게 사라질 것만 같아 망설입니다 그대는 한줌의 재가 될 수 없어 내 한줌의 손아귀 속에서 나는 나의 눈물로 그대를 자꾸자꾸 적십니다 불은 점차점차 매운 연기가 됩니다 그대는 그 매운 연기의 신열 속에서 어느새 눈물이 되고 고통이 되고 고통은 그대의 몸을 적십니다 눈물은 그대의 몸을 넘칩니다 온몸에서 온뺨에서 그대와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홍수로 만나 이렇게 견디고 있습니다 그리고 견뎌야 합니다
좋은 꽃, 민음사, 1985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지하 시인 / 베짜는 누이에게 외 5편 (0) | 2020.02.07 |
|---|---|
| 우원호 시인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외 1편 (0) | 2020.02.07 |
| 최하림 시인 / 유랑자(流浪者)들의 노래 외 1편 (0) | 2020.02.07 |
| 신경림 시인 / 제삿날 밤 외 2편 (0) | 2020.02.06 |
| 최하림 시인 / 우리들은 오늘도 외 1편 (0) | 2020.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