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베짜는 누이에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7.

김지하 시인 / 베짜는 누이에게

 

 

잘 있느냐

실꾸리 얼키기 쉽고

건강하냐

실꾸리 설키기 좋은 이때

웃고 사냐

실 끊어질라

울고 있냐

올 늘어질라

팽개치냐

바늘 부러진다

내던지냐

북통 깨진다

성을 내냐

날 처지고

화를 내냐

씨 흐트러진다

수선대냐

날씨도 매우 안 좋은데

서성대냐

내일은 더 궂다는데

토심나냐

궂은 날씨 조심 안허면

베는 확 잡치는 법이다

얘야

생각나냐

곰보할매 베틀 잉아

감잡히냐

날실을 못 처지게

뜻지피냐

굵은 줄로 올려메야

해볼 테냐

씨줄 모두 편다분해서

어쩔 테냐

날도 씨도 잘 짜인다

그리해라

베짜는 일이 다시없는

우주의 으뜸 철리이니

건강해라

바디를 부디 고르게 써서

잘 있거라

상목 좋은 놈 내거들랑

여불비례

두루막 한 벌씩 지어 입고

총총

성묘 가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반쪽 오빠 짐땅밑이 쓴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벼랑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 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벽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임이 화안히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불귀(不歸)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욱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비녀산

 

 

무성하던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웨쳐 부르든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오르는 맨드라미

터질 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이야기 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 타는 여름 머나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 바랜 사진 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즈막 우럴은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 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고

터질 듯한 노여움이 되살아오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웨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황토, 한얼문고, 1970

 

 


 

 

김지하 시인 / 비어(蜚語)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 야릇한 소리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주울줄 흘려샀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한 일다.

이는 대개 돈푼이나 있고 똥깨나 귀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

바로 저 소리다 쿵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 최루탄 터지는 소리냐 아니다 쿵

난리 터지는 소리냐 핵 터지는 소리냐 히로히도 방귓소리냐 아니다

닉슨 기침소리냐 아니다 북경(北京)도 천안문(天安門) 앞

코쟁이 맞아들이는 중공군(中共軍) 예포(禮砲)소리냐 아니다 그럼뭐냐

쿵 저봐라 쿵 또 들린다 쿵

저 쿵소리 내력을 누가 알꺼나 쿠궁쿵

어화 사람들아 저 소리 내력을 들어봐라

아라사도 미국 중국 일본국도 아닌 대한민국 서울 동편에

먼지펄펄 시끌덤벙 청량리 훨씬 지나가면 새까아만

연탄보다도 더 새까아만 쫄쫄 개굴창

물썩는 내 진동하는 중량천 기인긴 방축 위에 줄을 지어 다닥다닥

금슬좋게 들러붙어 비그닥

삐끄 삐끄 삐끄다다닥

바람결에 전후 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노래 노래 불러쌌는 판잣집 한 모퉁이 그 한귀퉁이 방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서 올라와 세들어사는 안도(安道)라는 놈이 있었것다.

 

 하략

 

창조, 1972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