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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베짜는 누이에게
잘 있느냐 실꾸리 얼키기 쉽고 건강하냐 실꾸리 설키기 좋은 이때 웃고 사냐 실 끊어질라 울고 있냐 올 늘어질라 팽개치냐 바늘 부러진다 내던지냐 북통 깨진다 성을 내냐 날 처지고 화를 내냐 씨 흐트러진다 수선대냐 날씨도 매우 안 좋은데 서성대냐 내일은 더 궂다는데 토심나냐 궂은 날씨 조심 안허면 베는 확 잡치는 법이다 얘야 생각나냐 곰보할매 베틀 잉아 감잡히냐 날실을 못 처지게 뜻지피냐 굵은 줄로 올려메야 해볼 테냐 씨줄 모두 편다분해서 어쩔 테냐 날도 씨도 잘 짜인다 그리해라 베짜는 일이 다시없는 우주의 으뜸 철리이니 건강해라 바디를 부디 고르게 써서 잘 있거라 상목 좋은 놈 내거들랑 여불비례 두루막 한 벌씩 지어 입고 총총 성묘 가자 모년 모월 모일 모시 반쪽 오빠 짐땅밑이 쓴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벼랑
북풍은 가슴을 꿰뚫고 이마 위에 눈 쌓인 시루봉이 차다
삶은 명치 끝에 노을만큼 타다 사위어가는데
온몸 저려오는 소리 있어 살아라 살아라 울부짖는다
한치 틈도 없는 벼랑에 서서 살자 살자고 누군가 부르짖는다
거리에 나서도 아는 사람 없는 빈 오후에.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벽
벽 그것뿐 있는 것은 그것 하나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 벽 그것뿐 내 마음에 내 몸에 몸 둘레에 너와 나 사이 모든 우리들 사이 벽 다시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붉은 벽 옛날 훗날 꿈길도 헛것도 아닌 바로 지금 여기 내 마음이 네 가슴속에 네 몸속에 내 살덩이가 파고들어 파고들어 끝없이 파고들어 기어이 본디는 하나임이 화안히 드러나 열리는 자유, 열리는 눈부신 빛무리 속의 아침바다 그것을 손톱으로 쓰는 그것을 흐느낌으로 우리가 쓰는 온몸으로 매일 쓰는 벽 네 이름을 쓰는 내 그리움을 눌러서 쓰는 벽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없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불귀(不歸)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욱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비녀산
무성하던 삼밭도 이제 기름진 벌판도 없네 비녀산 밤봉우리 웨쳐 부르든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시퍼런 하늘을 찢고 치솟아오르는 맨드라미 터질 듯 터질 듯 거역의 몸짓으로 떨리는 땅 어느 곳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옛이야기 속에서는 뜨겁고 힘차고 가득하던 꿈을 그리다 죽도록 황토에만 그리다 삶은 일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죽는 것
삶은 탁한 강물 속에 빛나는 푸른 하늘처럼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 송진 타는 여름 머나먼 철길을 따라 그리고 삶은 떠나가는 것 아아 누군가 그 밤에 호롱불을 밝히고 참혹한 옛 싸움에 몸바친 아버지 빛 바랜 사진 앞에 숨죽여 울다 박차고 일어섰다 입을 다물고 마즈막 우럴은 비녀산 밤봉우리 부르는 노래는 통곡이었네 떠나갔네
무거운 연자매 돌아 해 가고 기인 그림자들 밤으로 밤으로 무덤을 파는 곳 피비린내 목줄기마다 되살아오고 터질 듯한 노여움이 되살아오고 낡은 삽날에 찢긴 밤바람 웨쳐대는 곳
여기 삶은 그러나 낯선 사람들의 것.
황토, 한얼문고, 1970
김지하 시인 / 비어(蜚語)
서울 장안에 얼마 전부터 이상 야릇한 소리하나가 자꾸만 들려와 그 소리만 들으면 사시같이 떨어대며 식은땀을 주울줄 흘려샀는 사람들이 있으니 해괴한 일다. 이는 대개 돈푼이나 있고 똥깨나 귀는 사람들이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쿵 - 바로 저 소리다 쿵 저 소리가 무슨 소리냐 최루탄 터지는 소리냐 아니다 쿵 난리 터지는 소리냐 핵 터지는 소리냐 히로히도 방귓소리냐 아니다 닉슨 기침소리냐 아니다 북경(北京)도 천안문(天安門) 앞 코쟁이 맞아들이는 중공군(中共軍) 예포(禮砲)소리냐 아니다 그럼뭐냐 쿵 저봐라 쿵 또 들린다 쿵 저 쿵소리 내력을 누가 알꺼나 쿠궁쿵 어화 사람들아 저 소리 내력을 들어봐라 아라사도 미국 중국 일본국도 아닌 대한민국 서울 동편에 먼지펄펄 시끌덤벙 청량리 훨씬 지나가면 새까아만 연탄보다도 더 새까아만 쫄쫄 개굴창 물썩는 내 진동하는 중량천 기인긴 방축 위에 줄을 지어 다닥다닥 금슬좋게 들러붙어 비그닥 삐끄 삐끄 삐끄다다닥 바람결에 전후 좌우로 몸을 흔들어대면서 노래 노래 불러쌌는 판잣집 한 모퉁이 그 한귀퉁이 방에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서 올라와 세들어사는 안도(安道)라는 놈이 있었것다.
하략
창조,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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