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고두미 마을에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7.

도종환 시인 / 고두미 마을에서

부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사당을 다녀오며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이 내린다.

오동나무함에 들려 국경선을 넘어 오던

한줌의 유골 같은 푸스스한 눈발이

동력골을 넘어 이곳에 내려온다.

꽃뫼 마을 고령 신씨도 이제는 아니 오고

금초하던 사당지기 귀래리 나무꾼

고무신 자국 한 줄 눈발에 지워진다.

복숭나무 가지 끝 봄물에 탄다는

삼월이라 초하루 이 땅에 돌아와도

영당각 문풍질 찢고 드는 바람소리

발 굵은 돗자리 위를 서성이다 돌아가고

욱리하 냇가에 봄이 오면 꽃 피어

비바람 불면 상에 누워 옛이야기 같이 하고

서가에는 책이 쌓여 가난 걱정 없었는데*

뉘 알았으랴 쪽발이 발에 채이기 싫어

내 자란 집 구들장 밑 오그려 누워 지냈더니

오십 년 지난 물소리 비켜 돌아갈 줄을.

눈녹이 물에 뿌리 적신 진달래 창꽃들이

앞산에 붉게 돋아 이 나라 내려볼 때

이 땅에 누가 남아 내 살 네 살 썩 비어

고우나고운 핏덩어릴 줄줄줄 흘리련가.

이 땅의 삼월 고두미 마을에 눈은 내리는데.

 

* 12­14행은 단재(丹齋) 선생의 한시(漢詩) 형기일(家兄忌日)에서 인용.

 

玆菅Ì 마을에서, 창작과비평사, 1985

 

 


 

 

도종환 시인 / 그대 잘 가라

 

 

그대여 흘러흘러 부디 잘 가라

소리 없이 그러나 오래오래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댈 보내며

이제는 그대가 내 곁에서가 아니라

그대 자리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는 걸 안다

어둠 속에서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물에 누이고

나도 내 그림자를 물에 담가 흔들며

가늠할 수 없는 하늘 너머 불타며 사라지는

별들의 긴 눈물

잠깐씩 강물 위에 떴다가 사라지는 동안

밤도 가장 깊은 시간을 넘어서고

밤하늘보다 더 짙게 가라앉는 고요가 내게 내린다

이승에서 갖는 그대와 나의 이 거리 좁혀질 수 없어

그대가 살아 움직이고 미소짓는 것이 아름다와 보이는

그대의 자리로 그대를 보내며

나 혼자 뼈아프게 깊어가는 이 고요한 강물 곁에서

적막하게 불러보는 그대

잘 가라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8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