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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간척지 1
겨울 동안 주전자 속에서 푸른 바다 한 겹이 끓고 있다만 푸른 바다 한 겹 닳고 있다만 꽃샘바람 부는 서울을 등지며 바다여, 내가 너에게 닿는다 해도 네게 닿아 영혼의 아픔을 적신다 해도 바다여, 사랑이거나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다 우리들 넋 속에 감금된 벌판 저 멀리 승냥이 늑대가 줄지어 울고 갈가마귀떼 같은 바람 불안한 땅을 후릴 때 감귤 껍질 벗기는 다섯 손톱 밑에서 어느 날 믿음이 향기될 수 있으랴
외곬수의 허무 숭숭한 벌판에 몇 그루 키 큰 미루나무가 서서 하늘 가까이 새둥지 들어올렸다 해도 바다여 사랑이거나 사랑이거나 사랑이 아니다 몇 소절의 음악이 빠르게 음반을 지나고 촛불에 영혼 들이대는 밤에도 바다여, 고독이거나 고독이거나 고독이 아니다 산당귀 뿌리 같은 본능 하나 서럽게 살아서 버린 곡괭이 모습 삽날을 갈며 왕성한 식욕으로 내가 네게 가고ㅍ기 바다 밑을 말리는 태양이 되어 바다여 내가 네게 가고ㅍ기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 시인 / 객지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이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과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 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랑하게 울리는 그 가족들의 윤기 흐르는 웃음 소리, 유독 굳건한 혈연으로 뭉쳐진 듯한 그 가족들의 아름다움에 밀려 초라하게 풀이 죽곤 했는데,
그 분이 배려해 준 영양분 가득한 밥상을 대하면서 속으로 가만가만 젖곤 했는데, 파출부도 돌아간 후에 그 집의 대문을 쾅, 닫고 언덕을 내려올 땐 이유 없이 쏟아지던 눈물.
혼자서 건너는 융융한 삼십대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관계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 번째 회신 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 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 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배 한 척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미를 즐기고 언덕 아래서는 잔치를 끝낸 들쥐떼들이 일렬 횡대로 귀가할 무렵 노을을 타고 강을 건너온 그는 따뜻한 어깨와 강물 소리로 여자를 적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쁜 탓으로 마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미안하다며 빼놓은 마음 가지러 간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여자는 백여든아홉 통의 편지를 부치고 갈대밭 둔덕에는 가끔가끔 들것에 실린 상여가 나갔다 여자의 희끗희끗한 머리칼 속에서 고드름 부딪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겨울이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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