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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도종환 시인 / 김선생의 분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8.

도종환 시인 / 김선생의 분재

 

 

연말정리를 하다 교무실 창 밖을 바라본다

모과나무 숲 사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해사한 얼굴 위에 겨울 햇살이 매끄럽다

김선생은 철쭉 한 그루를 화분에 옮겨 심고

가지마다 굵은 철사를 동여매어

꺾이지 않을 만큼 이리 비틀고 저리 틀어

비는 시간마다 분재를 만든다

모두들 모여 서서 잘 되었다 잘 되었다고 한다

이 달이 가면 또 한 해가 저문다

모두들 잘 되었다 잘 되었다 할 것이다

모과나무 사이에서 쏟아질 듯 웃던 아이들을

급하게 불러들이는 종소리가 울려온다.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6

 

 


 

 

도종환 시인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 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1988

 

 


 

도종환 시인

1954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충북대 국어교육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4년《분단시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릉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이 있고,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모과』,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 등과 동화 『바다유리』 등이 있음. 1997년 제7회 민족예술상 수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