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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꿈꾸는 가을노래
들녘에 고개숙인 그대 생각 따다가 반가운 손님 밥을 짓고 코스모스 꽃길에 핀 그대 사랑 따다가 정다운 사람 술잔에 띄우니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늠연히 다가오는 가을 하늘 밑 시월의 선연한 햇빛으로 광내며 깊어진 우리 사랑 쟁쟁쟁 흘러가네 그윽한 산그림자 어질머리 뒤로 하고 무르익은 우리 사랑 아득히 흘러가네 그 위에 황하가 서로 흘러 들어와 서쪽 곤륜산맥 물보라 동쪽 금강산맥 천봉을 우러르네
고정희 시인 / 김춘수(金春洙)
참 이상한 일입니다 얼마 전 꿈속에서 김춘수(金春洙)를 만났습니다 김춘수는 검은테 안경을 끼고 목을 가만가만 흔들면서 중국 산동성(山東省)*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와 손 흔들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김춘수가 두고 간 대구시 방촌동*의 망가진 과수원 하나 내 방에 뎅그마니 비 맞고 있었습니다 비 내리는 과수원엔 시인(詩人)의 이름으로 엉컹퀴 마른 목이 곡하다 쓰러지다 곡하다 쓰러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팔공산의 여름도 내려와 썩고 이 땅의 시론(詩論) 같은 비닐하우스도 더럽게 젖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먹구름이 몰려오자 동서남북은 같다고 누군가 외쳤지만 아무도 동편을 동편이라 짚지 못함이 비바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봄밤의 꿈이려니 하고 싶으나 그것은 엄연한 가을밤의 꿈이었습니다
* 산동성: 맹․공자의 고향, 유교의 발상지. 한국은 이곳에 1914~1957년까지 기독교를 전파했다. ** 방촌동: 필자가 1978년에 살았던 하숙집 지명, 사과밭이 많이 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남남북녀 사랑노래
우리는 꿈꾸네 한사랑 꿈꾸네 둘이 살다 하나 되는 큰세상 꿈꾸네 기쁨이면 나누고 고통이면 맞들어 우리는 꿈꾸네 한살림 꿈꾸네
우리는 길을 가네 한겨레 길을 가네 둘이 가다 하나되는 한민족 길을 가네 힘든 길은 의지하고 험한 길은 쉬엄쉬엄 우리는 길을 가네 통일의 길을 가네
고정희 시인 / 남자현의 무명지
구한말의 여자가 다 이리 잠들었을진대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 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 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의 혼백 앞에 자유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 그때 그대는 보게 되리라 `대한여자독립원'이라 쓴
경북 안동 출신 남자현, 열 아홉에 유생 김영주와 혼인하여 밥짓고 빨래하고 유복자나 키우다가 딱 깨친 바 있어 안동땅에 자자한 효부 열녀 쇠사슬에 찬 물을 끼얹고 여필종부 오랏줄을 싹둑 끊으니 서로군정 독립단 일원이 되니라 북만주벌 열두 곳에 해방의 터를 닦아 여성 개화 신천지 씨앗을 뿌리며 세상도 따라 들어가 잠들고 오뉴월 한서린 여자의 넋 속에서 분노의 바이러스가 꽃처럼 피어나 무지개 빛깔로 이 지상의 모든 평화를 잠그고 있다 아아 하늘의 씨를 말리고 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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