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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하 시인 / 빈 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8.

김지하 시인 /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빈집

 

 

달빛 고일 때

새푸르른 답싸리

무성한 저 빈집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삭아내린 삽작문 너머

그림자 하나 하얗다 사라져버리네 기인

기인 비명이 꿈처럼 들려오던

빈집이여 가득히

달빛 고일 때

 

먼 마을로부터 삘리리

눈부신 구름으로부터 바람결에 삘리 삘리리

아련한 날라리 소리 들려오는 빈집이여

뜨락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아 낫 가는 사람

숨죽여 흐느끼며 낫 가는 사람

대처로 떠나갔다 숨어 돌아와 마지막

한 벌 흰옷으로 갈아입고 난 사람

 

땅에 떨어진

낫 끝에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득한 하늘에 천둥 은은하게 흐를 때

땅에 떨어진

빈집이여 빈집이여

땅에 떨어진.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산정리 일기(山亭里 日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깨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해주(海州)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남포가 터진다

흙차가 돌아간다

나는 흙 속에 천천히 깊숙히

대낮 속에 새하얀 잠의 늪 속에 빠져들어간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산조(散調)

 

 

초승달 등에 걸고

먼동으로 떠난다

 

뼛속 깊이

찬바람 으등대고

뼛속 깊이

붉은 먼동

흰 초생달

몸 한복판에

산조(散調) 한 자락

겨울이 자라고

 

뿌윰한 새벽길

쓸쓸한 삶의 향기가 자라고.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살림

 

 

화분 속에 수수 심어

가는 잎 보며 즐기는 사람

천정에 무우를 달아

돋아나는 푸른 싹 즐기는 사람

마음속에

마음속에 너를 키우는

 

짙은 냄새 억세찬 푸르름

다 잃어버리고

가늘어져 가늘어져

난초가 된 너를

마음속에만 그저 키우는 사람

 

햇빛 없는 날

오늘에 너를 묶는 나라는 사람

바람 없는 곳

추억에 너를 가두는 사람

그 마음의 감옥

 

부셔라

애린

끊어라 애린

탈출하라 바람 부는 저 벌판으로

내 사랑하는 애린

한 떨기 들꽃으로 시뻘건 흙으로

살아나라

다시 다시 살아나라

 

죽어가는 나

감옥은 죽음에게 맡기고

뒤에 남기고 뒤에 남기고

돌아보지 말고.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삼라만상 1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점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金芝河, 1941~) 시인

1941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황톳길」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는 『황토』,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애린』, 『검은산 하얀 방』, 『이 가문 날의 비구름』, 『별밭을 우러르며』, 『중심의 괴로움』, 『화개』 등이 있고, 『밥』, 『남녘땅 뱃노래』, 『살림』, 『생명』, 『생명과 자치』, 『사상기행』, 『예감에 가득 찬 숲그늘』,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편지』, 대설(大說)『남』, 『김지하 사상전집 (전3권)』, 『김지하의 화두』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 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  국제시인회의 위대한 시인상 (1981), 크라이스키 인권상(1981) 등과 이산문학상 (1993), 정지용문학상 (2002), 만해문학상(2002), 대산문학상(2002)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