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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 빈 산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빈집
달빛 고일 때 새푸르른 답싸리 무성한 저 빈집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삭아내린 삽작문 너머 그림자 하나 하얗다 사라져버리네 기인 기인 비명이 꿈처럼 들려오던 빈집이여 가득히 달빛 고일 때
먼 마을로부터 삘리리 눈부신 구름으로부터 바람결에 삘리 삘리리 아련한 날라리 소리 들려오는 빈집이여 뜨락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아 낫 가는 사람 숨죽여 흐느끼며 낫 가는 사람 대처로 떠나갔다 숨어 돌아와 마지막 한 벌 흰옷으로 갈아입고 난 사람
땅에 떨어진 낫 끝에 가득히 달빛 고일 때 아득한 하늘에 천둥 은은하게 흐를 때 땅에 떨어진 빈집이여 빈집이여 땅에 떨어진.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산정리 일기(山亭里 日記)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뜨거운 햇발 아래 하얗게 빛날 뿐 고여 흐르지 않는 둠벙 속에 깊이 숨어 끝끝내 나를 여기에 묶는 것은 무엇이냐
눈부신 붉은 산비탈 간간이 흔들리는 흰 들꽃들조차 가까이 터지는 남포 소리조차 아득히 멀고 흙에 갇힌 고된 노동도 죽음마저도 나를 일깨우지 않는다
흐린 불빛이 가슴을 누르는 소주에 취한 밤 목쉬인 노래와 칼부림으로 지새우는 모든 밤 뜬눈으로 지새우는 알 수 없는 몸부림에 기어이 나를 묶는 것은 아아 무엇이냐 무엇이냐 깨어 있지도 잠들지도 않는 끝없는 소리 없는 이 어설픔은 무엇이냐
밤마다 취해서 울던 붉은 눈의 해주(海州) 영감은 죽어버렸다 열여섯 살짜리 깨곰보도 취한 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에 와 있는 것이냐 나는 살아 있는 것이냐 무딘 느낌과 예리한 어둠이 맞서 섞이지 않는다 부딪히지도 않는다 또다시 시퍼런 새벽이 온다
남포가 터진다 흙차가 돌아간다 나는 흙 속에 천천히 깊숙히 대낮 속에 새하얀 잠의 늪 속에 빠져들어간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산조(散調)
초승달 등에 걸고 먼동으로 떠난다
뼛속 깊이 찬바람 으등대고 뼛속 깊이 붉은 먼동 흰 초생달 몸 한복판에 산조(散調) 한 자락 겨울이 자라고
뿌윰한 새벽길 쓸쓸한 삶의 향기가 자라고.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김지하 시인 / 살림
화분 속에 수수 심어 가는 잎 보며 즐기는 사람 천정에 무우를 달아 돋아나는 푸른 싹 즐기는 사람 마음속에 마음속에 너를 키우는
짙은 냄새 억세찬 푸르름 다 잃어버리고 가늘어져 가늘어져 난초가 된 너를 마음속에만 그저 키우는 사람
햇빛 없는 날 오늘에 너를 묶는 나라는 사람 바람 없는 곳 추억에 너를 가두는 사람 그 마음의 감옥
부셔라 애린 끊어라 애린 탈출하라 바람 부는 저 벌판으로 내 사랑하는 애린 한 떨기 들꽃으로 시뻘건 흙으로 살아나라 다시 다시 살아나라
죽어가는 나 감옥은 죽음에게 맡기고 뒤에 남기고 뒤에 남기고 돌아보지 말고.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삼라만상 1
썩은 물도 물은 물
흐르는구나 하늘을 비추는구나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구나
아니 구름 한 점 어린 것 보니 돌아오겠다
깨끗이 되어 또 오고 또 돌아오겠다.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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