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폐광(廢鑛)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8.

신경림 시인 / 폐광(廢鑛)

 

 

그날 끌려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리개차가 감속을 날라 붓던 버력 더미 위에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사월

지까다비를 신은 삼촌의 친구들은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켰다.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

밤이면 숱한 빈 움막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서

칸데라 불이 흐린 뒷방에 박혀

늙은 덕대가 접어 준 딱지를 세었다.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 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사라져선 돌아오지 않았다.

빈 금구덩이서는 대낮에도 귀신이 울어

부엉이 울음이 삼촌의 술주정보다도 지겨웠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폐촌행

 

 

떨어젼 나간 대문짝

안마당에 복사꽃이 빨갛다.

가마솥이 그냥 걸려 있다.

벌겋게 녹이 슬었다

 

잡초가 우거진 부엌바닥

아무렇게나 버려진 가계부엔

콩나물값과 친정어미한테 쓰다 만

편지

 

빈집 서넛 더 더듬다가

폐광을 올라가는 길에서 한 늙은이 만나

동무들 소식 물으니

서울 내 사는 데서 멀지 않은

산동네 이름 두어 곳을 댄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 함성(喊聲)

 

 

한때 우리는 말을 잃었다.

눈을 잃고 귀를 잃었다.

짙은 어둠이 온 고을을 덮고

골목마다 안개가 숨을 막았다.

 

웃음을 잃고 노래를 잃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몰랐고

누구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몰랐다.

꽃의 아름다움 저녁놀의 서러움도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다 그날

이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말을 찾아서 빛을 찾아서

웃음을 찾아서 내달리는 그들을.

어둠을 내어모는 성난 아우성을.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먼 숲 속의 새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이제 이 땅에 봄이 영원하리라 했으나

 

그러나 아아 그러나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쳤을 때

우리는 잊지 않으리라 비겁한 자의

저 비겁한 몸짓을 거짓된 웃음을.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어깨를 끼고 섰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섰다.

저것이 비록 죽음의 종소리일지라도.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고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이제 저 노랫소리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깨를 끼고 섰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신경림 시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