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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폐광(廢鑛)
그날 끌려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리개차가 감속을 날라 붓던 버력 더미 위에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사월 지까다비를 신은 삼촌의 친구들은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켰다.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 밤이면 숱한 빈 움막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서 칸데라 불이 흐린 뒷방에 박혀 늙은 덕대가 접어 준 딱지를 세었다.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 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사라져선 돌아오지 않았다. 빈 금구덩이서는 대낮에도 귀신이 울어 부엉이 울음이 삼촌의 술주정보다도 지겨웠다.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신경림 시인 / 폐촌행
떨어젼 나간 대문짝 안마당에 복사꽃이 빨갛다. 가마솥이 그냥 걸려 있다. 벌겋게 녹이 슬었다
잡초가 우거진 부엌바닥 아무렇게나 버려진 가계부엔 콩나물값과 친정어미한테 쓰다 만 편지
빈집 서넛 더 더듬다가 폐광을 올라가는 길에서 한 늙은이 만나 동무들 소식 물으니 서울 내 사는 데서 멀지 않은 산동네 이름 두어 곳을 댄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신경림 시인 / 함성(喊聲)
한때 우리는 말을 잃었다. 눈을 잃고 귀를 잃었다. 짙은 어둠이 온 고을을 덮고 골목마다 안개가 숨을 막았다.
웃음을 잃고 노래를 잃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는 몰랐고 누구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몰랐다. 꽃의 아름다움 저녁놀의 서러움도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다 그날 이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말을 찾아서 빛을 찾아서 웃음을 찾아서 내달리는 그들을. 어둠을 내어모는 성난 아우성을.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먼 숲 속의 새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이제 이 땅에 봄이 영원하리라 했으나
그러나 아아 그러나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쳤을 때 우리는 잊지 않으리라 비겁한 자의 저 비겁한 몸짓을 거짓된 웃음을.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어깨를 끼고 섰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섰다. 저것이 비록 죽음의 종소리일지라도.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고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이제 저 노랫소리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깨를 끼고 섰다.
새재, 창작과비평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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