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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휘 시인 / 참을 수 없는 밥의 무거움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최휘 시인 / 참을 수 없는 밥의 무거움

 

 

밀란의 책 속에는 벗어, 하면 의도가 없어지는 여자들이 많고 이거가 되면 저거도 되는 남자가 있고

 

그러나 밀란의 책 속에는 밥이 없고 출산이 없고 137페이지를 읽도록 밥상 차리는 장면 하나가 없고

 

그래서 나는 참을 수 없는 배고픔을 느끼고 끝내 배고픔에 도취되고 밥은 곧 사랑이라는 은유에 결박당하고 이건 현실이며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라고

 

밀란에게 항변을 하다가 밀란이 보는 앞에서 백주대로에 쓰러지고 싶고

 

내가 아침에 두부를 부치는 동안 146페이지의 A는 B앞에서 치마를 벗고 내가 저녁에 고등어를 굽는 동안 A는 B를 위해 다시 B를 배신하고

 

무릇 남녀의 동거가 시작되면, 밥이란 여자의 뒤에 풀어 놓은 개떼 같고 배신당한 세계이고 에로틱한 삶은 사라지고 어머니가 되고 내 위에서 버둥거리는 육체 하나를 갖게 되고

 

에로틱한 밀란은 밥을 가벼이 여기고 나는 밀란에게 가서 나 지금 집 앞이야, 하고 만두와 잡채와 갓 무친 오이김치를 내어주고

 

밀란의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은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고 오직 밥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다고

 

그래도 밀란은 은밀하고 에로틱하고 밀란은 사랑과 밥을 합쳐 놓은 것처럼 더 모호해지고

 

계간 『시산맥』 2019년 가을호 발표

 

 


 

최휘 시인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졸업. 2012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詩로여는세상, 2018)이 있음. 2018년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