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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상 시인 /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볼펜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이미상 시인 /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볼펜

 

 

사라예보 탄피로 만든 볼펜이 있다

 

노천카페에 앉아

밥을 먹던 사람끼리 웃고 떠들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이 볼펜이 정말 사람을 죽이고

남은 조각일까

멋진 황동 펜을 들고 있다가

공항 검색대에 걸렸다

 

볼펜이 빠져나간 손을 펴본다

여전히 위험하다는 걸까

 

흰 테이블보 위로

난처한 것들이 매일 쏟아졌다

 

사라예보는 깊고도 깊은 벙커

 

나는 테이블보를 표백제에 담근 채

하수구 밑으로 빠져나가는

속보들을 지켜보았다

 

장마가 이어지는 6월의 일요일

 

노트북 화면에서 달그락대는 탄피들

 

비행기가 막 이륙한 뒤

국경을 넘는 난민들

 

팽팽한 잉크 사라예보 총

 

시집『좀 더 자렴』(포지션, 2019) 중에서

 

 


 

 

이미상 시인 / 모과를 깎다

 

 

몰랐다

 

썩은 부위가 커질수록 향이 짙어지는 모과

 

한번 갈라 볼까요

 

잘 썩어 하나 된 입

말랑말랑한 몸

 

트림을 참아도 새어나오는 내 냄새

 

한숨마저 달콤해

 

보나 마나

우린 잘 썩어가고 있습니다

 

시집『좀 더 자렴』(포지션, 2019) 중에서

 

 


 

이미상 시인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2007년 《불교문예》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좀 더 자렴』(포지션, 2019)과 산문집 『어디든 멀리 가고 싶은 너에게』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