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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고정희 시인 /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새벽에 깨어 있는자, 그 누군가는

듣고 있다 창틀 밑을 지나는 북서풍이나

대중의 혼이 걸린 백화점 유리창

모두들 따뜻한 자정의 적막 속에서도

손이라도 비어 있는 잡것들을 위하여

눈물 같은 즙을 내며 술틀을 밟는 소리

 

들끓는 동해 바다 그 너머

분홍살 간지르는 봄바람 속에서

실실한 씨앗들이 말라가고 있을 때

노기 찬 태풍들 몰려와

산준령 뿌리 다 뽑히고 뽑힐 때

시퍼런 눈깔 같은 포도알 이죽이며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속이라도 비어 있는 빈 병들을 위하여

혼이라도 비어 있는 바보들을 위하여

눈귀 비어 있는 저희들을 위하여

빈 바람 웅웅대는 민둥산을 위하여

언 강(江) 하나 끌고 가는 순례자 위하여

아픈 심지 돋우며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갈 곳이 술집뿐인 석탄불을 위하여

떠날 이 없는 오두막을 위하여

치졸들 와글대는 사랑채를 위하여

활자만 줍고 있는 인쇄공을 위하여

이리저리 떠밀리는 장바닥을 위하여

가야금 하나가 절정을 타고

한 줄의 시(詩)가 버림을 당할 때

둔갑을 꿈꾸는 안개 속에서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잠든 메시아의 봉창이 닫기고

대지는 흰 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작은 길 하나까지 묻어버릴 때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 사람아,

 

그의 흰 주의(周衣)는 분노보다 진한

주홍으로 물들고 춤추는 발바닥 포도 향기는

떠서 여기저기 푸른 하늘

갈잎 위에 나부끼는 소리 누군가는

듣고 있구나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 시인 / 대청봉 절정가

 

 

마술에 걸린 늑대 한 마리

대청봉 꼭대기로 치닫습니다

수백년 칙칙한 밀림을 가로질러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젖히며

사지에 불을 켠 늑대 한 마리

내설악 골짜기 올라갑니다

박달나무 사시나무 사납게 치솟아서

늑대 털뿌리 희게 뽑히고

가시나무 칡넝쿨 제철을 만나

살 찢기는 늑대울음 계곡 아래 구릅니다

오래 전 죽은 길도 나무 뿌리에 누워

날짐승 소리 아쓱한 깊은 산

깊은 산속 늑대 한 마리

바윗등에 불거진 독버섯 문지르며

천년 자는 늪지대 이슬에 씻기며

높은 곳 상봉에 다다릅니다

어디선가 산 아래 늑대 부르는 소리 들리고

사방에 열린 거울 속으로 아아

흰옷 입은 사람 하나

대청봉에 서서

떠오르는 구름에 실려 갑니다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 시인 / 도요지(陶窯地) 1

 

 

적막한 산에 묻어둔

겁을 두고 저장된 성욕을 퍼올리며

흙의 맨살에 떠는 삽이여

흙의 향기에 기침하는 삽이여

삼림 흔드는 구천리 바람 속

외로운 정신들 돌아와 그루터기에 서서

머나먼 산하 굽어보는 아침에

머나먼 이별 뒤돌아 우는 아침에

지혜롭구나 삽이여

지칠 줄 모르는 근육과 합하여

고구려를 내려가고

백제를 내려가고

흰 이조의 살과 뼈를 건너질러

드디어는 우리들 상한 가슴에 닿아

상한 가슴 그루터기에 닿아 그루터기

절망으로 바스러진 흙 한 줌

고구려로 돌아가

백제로 돌아가

우리들 안타까운 넋으로 받쳐든 흙

한 줌 허상 휘어잡는 피리 소리에 떠서

여자 태(胎) 허무는 꼬박* 부르는구나

 

* 꼬박: 도자기를 굽기 위해 흙을 짓이기는 것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 시인 / 들국

 

 

시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가

경기도 들녘에서 꺾어온

들국 한아름을 꽂아 놓고

불현듯 핑그르르 눈물이 돈다

그것은 시골에 그냥 핀 들국이 아니라

고향을 다녀올 때 본

어머니의 망연한 눈빛 같기도 하고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수유리에서 해남쯤으로 떠도는

못다 핀 망령들의 이름 같기도 하고

좀더 길게 음미하노라면

서른아홉 살의 목숨을 거두고

두 마리, 빈곤을 상징하는 노새에 끌려

아틀랜타 시가지를 빠져나가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를 따르던 흑인영가 같기도 하고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