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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하림 시인 / 정방폭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최하림 시인 / 정방폭포

 

 

저녁마다 안개가

아랫도리를 가리는 서귀포(西歸浦)에서

정방폭포가 흰 몸뚱이째로

떨어지면서 말하더라

수치스럽다고 말하더라

수치스러워 못 살겠다고 말하더라

하늘도 땅도 보이지 않는 천길

벼랑에서 사지가 녹아드는 그리움으로

울부짖어도 별들은 보이지 않고

별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더라

밤마다 안개가 아랫도리를 감는

서귀포(西歸浦)에서 술을 마시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마음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

너의 것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닌

소리 들으며 동서남북(東西南北) 소리쳐도

들리는 것은 검은 수면(水面)에 일었다

사라지는 물포래뿐 물포래뿐……

 

작은 마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2

 

 


 

 

최하림 시인 / 즐거운 딸들

 

 

즐거운 딸, 바람쟁이 딸들! 그들 땜에 우리집은 얼마나 소란스러운가!

 

구름처럼 젖가슴이 벌어지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가지고 남자들을 라켓으로 바꿔치면서 그들은 신촌으로, 압구정동으로! 꿈에서도 남자들이 꽃다발 바치며 애달아해도 슬쩍슬쩍 눈 피하고 향기 피웠지 전화질했지 어려서부터 큰애는 바람쟁이여서, 숙제 끝나면 거울 앞으로 가, 땀 뻘뻘 흘리며 춤을 추었고, 둘째는 가끔씩 고장난 로보트춤을 추었지 아름다웠지 그들의 춤은 목적이 없고 관객이 없으므로 그들 자신이 춤이고 즐거움이었으므로

 

꽃 같으고 나비 같은 처녀들이여! 춤추는 처녀들이여!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어른들이 불러도

돌아보지 말아라 춤추며 가거라

너희들, 있는 세상, 벼락처럼

장미 피고 향기 넘치노니

어느 날 애인에게 바람 맞고

자존심 상해할 때, 오매!

우리 딸 바람맞았네 놀릴지라도

기죽지 말아라 바람피워라

바람이 이 세상 생명이고 기쁨이니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지성사, 1991

 

 


 

최하림[崔夏林,1939.3.7 ~ 2010,4.22]  시인

1939년 전남 목포에서 출생.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貧弱한 올페의 回想〉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작은 마을에서』, 『겨울 깊은 물소리』,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 『풍경 뒤의 풍경』,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와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햇볕 사이로 한 의자가』, 판화 시선집 『겨울꽃』, 자선 시집『침묵의 빛』 그리고 시전집 『최하림 시 전집』 등이 있음 그 밖에 미술 산문집 『한국인의 멋』, 김수영 평전『자유인의 초상』과 수필집 『숲이 아름다운 것은 그곳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최하림 문학산책 『시인을 찾아서』 등을 펴냄. 제11회 이산문학상,

제5회 현대불교문학상, 제2회 올해의 예술상 문학 부분 최우수상 수상. 전남일보 논설위원, 서울예술대학 교수 역임. 2010년 간암으로 他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