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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환 시인 / 모내기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9.

김정환 시인 / 모내기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힘으로 사는 게 아니다.

 

흙 파먹고 농사나 지으리라

모를 심는다

살기 위해서 모는 벌써 심기 시작한 내 손아귀를 벗어나

논바닥에 물을 댄 진흙창 속에서

그 질펀질펀한 땅속으로 뿌리 내리기 위해서

한줌에 다섯 개, 여섯 개씩 뭉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뿌리의 안스런 엉켜 있음.

그래도 모는 그 허공같이 공허한 진흙창 속에서

공중곡예를 하면서 뿌리내린다

바람이 불수록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모는 진흙창 속에서 살기 위해서

다섯씩 여섯씩 뿌리 내린다

 

연약한 뿌리가 꺾이지 않게

세 손가락에 빗대어 직각으로

사정없이 푹 꼽아줘야

사정없이 사랑해줘야 산다는

모.

그러나 논물 밑에 젖은 땅, 젖은 가슴이 푹신푹신 숨쉬며

흙 묻은 손으로 나를 사랑해 주소,

사랑해주소, 나를, 그대의 땀방울 맺힌 근육으로 하는

논바닥, 논바닥 아아 땡볕에 드러나

타는 갈증 갈라질 논바닥.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모의 털난 뿌리를 쥐어 잡고

진흙의 몸끝에 대기만 하면서

부끄럽게 살짝 대기만 하면서

나는 이제야 알겠다 모가 아슬아슬하게 공중곡예를 하면서

이쪽 바람에도 쏠리고 저쪽 소문에도 넘어지고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는 것은 모의 재주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나의  잔꾀가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거대한 땅의 우매한 갈증,

우매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모는 단숨에 두세 줄쯤 건너

허공 같은 바탕 위에

벌써 굳건히 서 있다

뜨지 않고 눕지 않고 똑바로 서 있다

등이 타는 뙤약볕 밑에서

 

올해도 농사는 땅의 억센, 포옹의 힘에 달려 있다.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김정환 시인 / 묘비명(墓碑銘) 1

 

 

그는 이 세상에서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독가스의 화공약품 냄새 허파를 가득 메우는

작업현장에서 2개월을 일하다 쓰러졌다 그가 만든 도자기는

단란한 살림그릇으로 쓰이고 행복한 커피잔으로 쓰였다

그는 쓰러졌고, 의식을 되찾는 데는 또 2개월이 걸렸고

우리들은 그가 만든 그릇으로 사랑했고 의논했고 어깨 겯었다

 

그는 치료불능 반신불수가 됐고 우리들은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다 몇몇 동지를 잃었다 의사는 빈혈이라 했고

회사는 산업재해가 아니라 했다 그는 7층 옥상에서 투신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일어나지 않으면 사랑엔

현기증이 묻어 있고 비명소리가 묻어 있고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들 행복에

화공약품 독가스가 묻어 있다 그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으로 일어날 것

가난한 때문 아니라 슬프기 때문 아니라 억울한 때문 아니라

우리를 위해, 만인을 위해 그는 살아나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으로

권력은 이미 고난과 투쟁과 죽음을 통해 해방에 이르는

상부도 아니고 하부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고 주변도 아닌

바탕과 본질에서 스스로 이루는

민중의 권력

그 권력은 민중해방―민족통일 이루기 위하여

피 흘려 죽어간 모든 전사들에 대한 기억과 생산―투쟁의 우리들이

우리들 노동자가 밥과 희망과 안방과 달력과 미래를 관장하는

숭고한 일상이 이루는 죽음의 권력

 

그는 투신자살했다 전태일 김경숙 김종태 박종만

홍기일 박영진 그 숱한 노동운동 전사자들 속으로

그는 투신자살했다 김상진 김의기 김태훈 이동수

김세진 이한열 그 숱한 학생운동 전사자들 속으로

운동의 운자도 모르는 그가 투쟁이란 말은 너무 살벌하다던 그

이름없는 그가,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갈 것이다

고난을 통해 투쟁을 통해, 흘리는 피땀과 눈물을 통해

이제 그가 일어설 것이다 이제는 이름없는 네가

그들을 천진난만하게 일으켜 세워라. 1987. 10. 12. 조성애.

 

우리 노동자, 동광출판사, 1989

 

 


 

 

김정환 시인 / 묘비명(墓碑銘) 2

 

 

잠이 안 와요, 머리가 아파요, 밥을 먹기 싫어요, 온몸이 아파요,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불면­두통­식욕감퇴­전신통증­전신장애­고혈압­가려움증­헛소리, 아아 병으로만 어른의 삶을 살다가 그는 갔다, 문송면. 만 15세. 발바닥이 가려워 마구 긁어댄 손톱독 피멍이 발등을 전기고문처럼 새까맣게 태웠건만 끝내 돈, 돈! 외치며 그는 죽었다. 수은중독, 그가 만든 온도계는 여느 신혼 가정의 갓난애 겨드랑 속에서 분내랑 향수내랑 맡고 있겠건만 이 세상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려고 그가, 당당한 노동자가 온도계를 만들던 공장은 수은이 밑바닥에 질척한 증기로 깔린 채 환풍시설조차 없는 인간 도살장이었고, 노동은 하루 열여섯 시간의 생지옥이었고, 삶은 짜고 쓴, 썩은 무말랭이 보리밥 한 끼의 아비규환이었다. 만 15세. 그 수은증기가 올림픽 쇼무대를 장식하는 신기한 구름파도였다고 해도, 그 공장이 용감무쌍한 람보의 베트남 정글지대였다고 해도, 그 삶이 무인도 톰소여의 모험이었다고 해도 곧이들었을 천진난만한 나이에 그는 수박을 같이 먹다가 간혹 천진난만하게 웃다가 마지막으로 숨을 헉헉거리다가 죽었다. 만 15세, 1973년 충남 서산군 양산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여 중학교를 마치고 자력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 서울의 온도계공장 협성계기에 취직하고 2달 만인 1988년 7월 2일, 수은과 유기용제 중독으로 사망했다. 회사는 몸이 안 좋던 석 달 동안 산재처리를 하지 않았고, 노동부는 산재처리 신청을 기각했다. 회사와 노동부가 그를 죽이고, 가난한 조국이 그를 죽이고, 부르조아 매판정권의 악덕자본가가 그를 죽이고, 신식민지 교육제도가 그를 죽이고, 얄팍한 중산층 가정 행복이 그를 죽이고, 미제 침략의 음란광포한 대중문화가 그를 죽이고,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이 그를 죽이고, 우리의 무관심이 그를 죽였다. 이 썩은 세상 어른들의 모든 죄악이 그를 죽였건만,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탓하지 않고, 슬픔도 죽음도 모르는 채, 다만 한 장의 순결한 육체가 스스로 더럽혀져 자신을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증거하고, 끝내 천진난만한 채 갔다. 슬퍼 말라, 그는 죽음을 모르나니, 산 자의 온갖 슬픔의 무게도 그의 어깨를 억누르지 못하나니, 죽음의 자본가 예속세상이 삶의 노동자 해방세상으로, 슬픔의 미제(美帝) 식민지가 기쁨의 자주 통일 조국으로, 참혹한 노예의 전쟁이 환희로운 생산주체의 평화로 변혁되는 날 그는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당당한 노동자로. 힘차고 아름다운 노동자로. 1988년 7월 2일 만 15세, 문송면.

 

우리 노동자, 동광출판사, 1989

 

 


 

김정환(金正煥, 1954년 ~ ) 시인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80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강변 동내에서〉 등이 추천되어 등단. 주요 작품으로 〈해방 서시〉,〈유채꽃밭〉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 《황색예수》,《지울 수 없는 노래》,《좋은 꽃》 등이 있다. 시대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결의와 열린 감성으로 우리 시대의 언어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를 폭포처럼 쏟아”낸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다작하는 시인이다. 2007년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으로 제9회 백석문학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