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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시인 / 허재비굿*을 위하여
잡아주오 내 손을 잡아주오. 흙 속에 묻힌 지 삼십 년 원통해서 썩지 못한 내 손을 잡아주오. 총알에 으깨어지고 칼날에 찢어진 내 팔다리를 일으켜주오. 밤마다 내 어머니 흐느껴 우는 소리 들리지만 나는 갈 수 없어, 산과 들을 헤매이며 나를 찾는 어머니 통곡소리 들리지만 나는 못 가. 철적은 비 구죽죽이 내리는 밤이면 머리 쥐어뜯으며 흐느끼기도 하고 늑대 애터지게 울어쌓는 찬 새벽이면 엉금엉금 흙 속을 기어보기도 하지만, 내 형제가 내 가슴을 쏜 것이 나는 원통해, 내 친구가 어깨 찌른 일을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복사꽃처럼 붉던 두 볼에 젖무덤에 허벅지에 검푸른 풀 돋으리라 어이 알았으리. 잡아주오 내 손을 잡아주오 원통해서 썩지 못한 내 손을 잡아주오.
잡으리라 내 그대 손 잡으리라. 나 또한 어깨에 등허리에 머리통에 총알이 박힌 채 대창이 꽂힌 채. 우리가 쏘고 맞고 찌르고 찔리면서 죽던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해. 새빨간 노을 속으로 가마귀떼 날아가던 그 가을 언덕을 나는 잊지 못해. 피 쏟으며 쓰러지던 그대 그 붉은 입술을 나는 잊지 못해. 삼천 날 삼천 밤을 뉘우쳤지, 흙 속에서 통곡하며 뉘우쳤지.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오, 미워하지도 않았다오. 잡으리라 내 그대 손 잡으리라. 원통해서 썩지 못한 그대 손 잡으리라. 아직 더운 내 입김으로 내 혓바닥으로 그대 상처 녹이리라. 그리하여 날아가리라 함께 날아가리라, 그대 어머니 내 어머니 울음소리 들리는 곳, 내 친구들 형제들 노랫소리 울음소리 가득한 곳으로. 잡으리라 원통해서 썩지 못한 그대 손 잡으리라. 햇빛 온 누리에 가득한 곳으로 그대 손 잡고 날아가리라.
* 허재비굿: 동해안 지방에서 젊은 원혼의 인연을 맺어줄 때 하는 굿으로, 화해의 뜻이 깊음.
달넘세, 창작과비평사, 1985
신경림 시인 / 홍천강
뒷짐을 지고 서양개처럼 뛰면서 받아먹어야 초콜릿과 비스킷을 던져주는 조지나 톰보다도 레이션 한 상자를 훔치고서 집차 뒤에 쇠줄로 묶여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연병장을 도는 못난 어른들이 나는 미웠다 그해 겨울엔 유난히 눈이 많이 와 내가 베네트라는 백인 장교의 양말을 빨고 구두를 닦고 야전침대에서 발치잠을 자다가 멀리서 들리는 야포 소리에 잠이 깨어 천막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면 눈발이 모래알을 몰아다가 얼굴을 때렸다 나는 담배 한 가치에 드로프스 한 알에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꿈속에서도 미웠다 달밤이면 승냥이 우는 소리에 섞여 중공군이 분다는 호적 소리도 들리는데 기계충 오른 아이들만을 모아 사진을 찍고 통조림 깡통을 강물에 던져 허기진 아이들을 허겁지겁 살얼음 언 물 속에 뛰어들게 하는 그 백인 장교는 한국을 사랑한다고 했다 한밤에도 그는 금발의 딸 사진을 꺼내보며 훌쩍대고 나는 머지않아 양키 대신 오랑캐의 양말을 빨고 구두를 닦게 될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걱정에 잠 설치는 밤이 많았다 잔치 구경을 가는 날은 장난으로 총질을 해서 손님을 쫓고 심심풀이로 암소를 쏘아죽이는 흑인병사보다 말끝마다 이들을 은인이라 두둔하고 술대접에 허리가 굽는 동네 어른들이 나는 미웠다 유난히 밤이 춥고 무서워 한밤중에 꺾어진 미류나뭇가지가 천막을 후려치고 얼음이 죽은 병사들의 웃음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홍천강이 그해 겨울 내게 가르친 것은 미움뿐이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읍내를 어슬렁거리며 삽작을 밀어보기도 하고 거적대기를 들쳐보기도 하는 지아이보다도 읍내 처녀애들이 더 미워 영어 마디나 배우겠다고 따라다니는 여학생 애들이 더 미워 좀체 잠이 안 오는 그런 달밤이면 등너머에서는 승냥이가 울고 눈 위로 미끄러지며 호적소리가 들리고 머지않아 이 고장에도 중공군이 온대서 홍천강은 겨우내 뒤숭숭했다
난한 사랑노래, 실천문학사, 1988
신경림 시인 / 화톳불, 눈발, 해장국
새벽 장바닥에 화톳불이 탄다 누더기가 타고 운동화가 탄다 구두닦이와 우유배달이 서서 불을 쬔다 매운 바람은 불꽃을 날리고 널조각이 탄다 삭정이가 탄다 가겟문 여는 소리 가래 뱉는 소리 이른 장바닥에 눈발이 날린다 부드럽고 가는 눈발이 날린다 신문배달 오토바이와 쓰레기차에 날린다 방범대원의 움츠린 어깨 위에 날린다 포장마차에 날리고 채소더미에 날린다 채소더미 뒤 대폿집에서 해장국이 끓는다 담뱃자국 곰보식탁에 미장이가 앉았다 운전수가 앉았고 청소원이 앉았다 뜨거운 국물들을 훌훌 마신다 밝아오는 장바닥에 화톳불이 탄다 화톳불 위에 눈발이 날린다 눈발 속에서 해장국이 끓는다 삐걱대는 걸상에 엉덩이를 붙이고 뜨거운 국물들을 훌훌 마신다 언청이도 마시고 곰배팔이도 마신다 낚시꾼도 마시고 장꾼도 마신다 들이치는 눈발 머리칼에 맞으며 더러는 언 어깨들을 기댄다 새봄 이른 새벽 화톳불이 탄다 지난 겨울의 쓰레기들이 타고 너절한 것들 더러운 것들이 탄다 부끄러운 것들이 탄다 잊고 싶었던 것 버리고 싶었던 것들이 탄다 화톳불 위에 눈발이 날리고 눈발 속에서 해장국이 끓는다
쓰러진 자의 꿈, 창작과비평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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