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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정희 시인 / 디아스포라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0.

고정희 시인 / 디아스포라 -1-

 

 

황제의 굳건한 안정을 믿으며

죽음의 집으로 돌아와

사방 넉 자짜리 자유의 벽지로

아방궁 같은 무덤을 도배했어

무덤은 언제나 밝고 아늑하네

황제가 내려 주신 모닥불에 둘러앉아

야구 경기와 권투 시합을 보며

입이 아프도록 승리를 신봉하고

머리맡에 예비된 숙면의 술잔으로

보다 깊이 잠드는 최면을 거네

황제는 꿈 속에서 빙그레 웃으시니

우리의 충정은 가이 눈물겹게

5호 활자 속에서 `예언'도 잠드시니

그제는 고향을 팔아 버렸고

어제는 의령을 잊어버렸고

오늘은 공약을 삼켜 버려야 하네

새 법이 오리라 믿어야 하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는 또 하나의

튼튼하고 아름다운 무덤을 건축하며

밤을 낮이라 어둠을 빛이라 이름함으로써

`새 시대는 열렸다' 믿게 되었네

 

오 우리들의 두 귀는 운다네

암호로 떠도는 이 시대의 언어를

망각으로 망각으로 망각으로 흘려 보내고

이 땅의 젊음을 잠시 전율하지만

그것을 잊는 데는 두 주일이 안 걸린다네

애오라지 밝고 아늑한 무덤의 평화

사방 넉 자짜리 미래를 의지하여

탐스런 꽃봉이들 영그는 중이니

황제는 꿈속에서 빙그레 웃으시고

우리들의 나날은 가이 고요하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디아스포라 -2-

 

 

흐리고 어두운 날

남산에 우뚝 선 해방촌 교회당은

날벼락을 맞아 검게 울고

무더위로 가라앉은 내 몸 속에서는

그리운 신호처럼 전신주가 운다

끝간데 없는 곳으로부터

예감처럼 달려오는 그 소리는

한순간 고요히 물로 풀어지다가

불로 일어서다가

분노가 되다가

이내 다시

내 고향 해남의 상여 소리가 되어

저승으로 뻗은 전신주를 따라 나간다

우리의 침묵 깊은 곳에서

민들레 한 송이

서늘하게 흔들리는 오후,

민들레로 떠도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디어

칼 쓴 예수가 갈짓자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망월리 비명(碑銘)

 

 

한 세대 긋고 지난 업보가 어디

망월리에 잠든 넋뿐이랴만

한 시대가 쌓아올린 어둠의 낟가리에

불쏘시개 되어 하늘 툭 틔우고

황산벌 숯가마로 묻힌 저들이

오늘은 가는 달 붙잡고 묻는구나

내 죄값을 달에게 묻는구나

한 세대 긁고 지난 칼 자국이

어디 내 죄값뿐이랴만

내가 달과 마주서니 속물일 뿐이어서

국화 한 다발도 속될 뿐이어서

달로 떠오르는 네 외짝눈과 만나니

부끄럽구나

한 평 땅 덮지 못할 내 빛

무력한 근심이나 보태는 오늘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묵상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들길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나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에를 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에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는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리운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막한 슬픔으로 비어 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미궁(迷宮)의 봄 2

 

 

늑대 몇 마리 매일 밤 사랑의 솔밭에 와서 웁니다 늑대 두 마리 매일 밤 영혼의 강가에 와서 웁니다 늑대 세 마리 매일 밤 고독의 살 냄새에 길길이 뛰고 늑대 몇 마리 매일 밤 순한 욕망의 피에 굶주립니다 늑대 발자욱이 그대를 떠날 때 우리는 이미 잃은 자들입니다

 

이쁜 우리 어린것들을 노려 보는 것은 늑대로 그대 정신 달여 부은 만남의 뚝 인정의 뚝 넘보는 것은 늑대고 이빨 마주치며 버티는 내 종말론적 삶의 보루를 날선 발톱으로 찔러대는 것은 늑대입니다 늑대의 새끼를 밴 늑대입니다 아아 그대 눈에서 나는 모든 것을 보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그대 눈에 있습니다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高靜熙, 1948 ~ 1991. 6. 9】 시인

본명은 성애. 1948년 전남 해남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 졸업. 1975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 교수 잡지사 기자 등을 거쳐 『또 하나의 문화』 창간 동인,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역임. 1991년 6월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요절.  '목요시' 동인으로 오월 시인으로 활동.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 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