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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 시인 / 서울 사랑 -3-
명분 있는 우리들 회합에 가서 어르신네 동석한 술상 귀퉁이에 앉아 보기 드문 안주와 술을 대하였다 열 명 남짓한 그 점잖은 자리 끽해야 두세 시간 비비작댄 그 경제적인 자리 그러나 아우야 그 두세 시간 동안 수갈래로 엇갈리는 길을 보면서 그 두세 시간 동안 이십 년 산 대어를 도마 위에 올려 놓고 가차없이 발기는 보수주의 칼을 보면서 아우야 나는 너를 그리워했다 아우야 나는 너를 무서워했다 아편 묻은 보수주의 바늘을 향하여 언제 내 팔뚝을 걷어 올릴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우야 무서운 건 순수하게 불타는 네 가슴 새로움을 개간하는 네 정신이었다 찬․반의 논리가 불편한 이 땅에서 철없이 뛰노는 우리들의 아이들이 네 죄업이라고 말하던 용기를 묵상했다
어디서 익히 듣던 말대로 양심시(詩)는 김(金)아무개의 전속물이 되었고 순수시(詩)는 서(徐)아무개의 방패라 하드라만 실천시(詩)는 고(高)아무개의 칼집이라 하드라만 자유시(詩)는 박(朴)아무개의 전리품이라 한들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는 줄기대로 벌거숭이 섬 하나 덮어 주지 못한 채 산과 들에 잡초들 무성하니 아우야 우리는 외로운 세대구나 아우야 우리는 위험한 세대구나 아우야 우리는 밑구멍만 뻘건 디아스포라,* 그러니 이후라도 사랑․진리․자유 따위는 함부로 입 밖에 내뱉지 말거라 어디라고 함부로 확신하지 말거라 보기 드문 안주와 술을 나눠 먹고 점잖게 일어서는 우리들의 회합에서 나는 똑똑히 보았다 두세 시간 동안 발겨진 뼈다귀에는 쉬파리도 구데기도 들끓지 않더라 근엄하고 단단한 쓰레기 플라스틱 폴리에스텔 쓰레기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숙명이라 하드라 사람들은 그것을 시대 체험이라 하드라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하드라 임진왜란 한일합방 육이오라 하드라
오 그러나 아우야 우리는 짐짓 깨닫게 되었지 우리가 함께 자란 고향의 두엄 더미 무성한 여름날 너른 마당 구석에 온갖 더러움 다 쓸어 붙인 두엄 더미 새롭구나 바랭이 토끼풀 똥 오줌과 함께 돼지막 혹은 마구간에서 고향 사람들 시시로 쳐내던 석은새 속에서는 일가족 밑거름이 무럭무럭 자랐지 살모사의 혀까지도 두엄 속에 넣으면 불로장수의 술이 되었지
한양 생활 십여 년 인스탄트 우정에 길들고 난 후 우리가 지킨 건 무엇이드냐 대도시의 변두리로 사지를 몰아 붙인 후 우리에게 남은 건 무엇이드냐 우리들 자수성가 세대의 믿음은 철저한 연민에도 철저한 분노에도 이르지 못하고 네 두터운 어둠과 내 거짓말이 두엄이 되지 못하니 네 필사적인 신념과 내 중뿔난 철학이 두엄이 되지 못하니 아우야 우리는 좌절 없는 세대구나 아우야 우리는 전답 없는 세대구나
서울의 하늘밑 어디서나 새벽 세시면 푹푹 갈퀴에 찔려 매립지로 실려 가는 못 썩는 쓰레기 그 위에 사내들은 미래의 집을 짓고 제비뽑기로 나눠갖지만, 아우야 우리가 숨구멍 틀어막아 버린 땅 자생 메탄 가스는 지층 깊숙이에서 푸른 불줄기 후끈후끈 뽑아내어 우리가 잠든 벽 틈으로 잠복하고 저 한강은 콸콸 분노의 비늘을 세워 주야 경악스런 가래를 게워 내는 동안 경제××지로 통하는 지하철이 뚫리고 원격 조정 바벨탑이 서울에 직수입되는 동안
오오 그러나 아우야 저주의 벌판에 피뢰침을 세운 아우야 너를 가진 역사는 피로 기록되겠구나 `정신'이 `사랑'임을 굳게 믿는 너는 아무도 믿지 않는 `도래'를 확신하면서 젊은 네 한 몸 기꺼이 던져 이름 없는 자유의 제방이 되었다지 누구도 치지 못할 둑으로 누웠다지 우국 지사처럼 당당하게 죽거나 유명 인사처럼 문상도 받지 못한 채 다만 척박한 조국의 땅을 위하여 허수아비 쓸쓸한 호남 평야에 한 바지기 두엄으로 훠이훠이 뿌려졌다지 목숨 걸면 무엇이나 아름답듯이 목숨 바친 네 사랑 앞에서 무슨 논리인들 살아 남으랴
우리는 오늘밤 강변에 앉아 떨리는 물잔을 높이 치켜들고 천지 신명께 깊이 읍소하였나니 동해 푸른 자웅에 붓을 적셔 크고 넓은 하늘에 이렇게 쓰고 싶었다
오 야훼님 노하지 말으소서 한 번만 더 간청하오니 여기 의인 열 사람만 두엄으로 뿌려지면 이 땅을 멸하지 않으시렵니까?*
* 디아스포라: 원래는 희랍어인 이 용어는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살면서 그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적 전통을 고수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그 형태는 그 시대에 정착하지 못한 유목민들로 대치되었으며 이는 ① 자기네 신앙의 끈질김과 유산의 내구력을 입증하는 하나의 증거였고 ② 또 디아스포라는 낯선 이국 땅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두보로 해석되었다.
** 창세기 18장 32절에서 전용.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시인(詩人)
그대 눈썹 밑에 흐르는 미시시피 물안개에 사흘을 넋잃다 그것을 가지면 밥이 되고 갖지 않으면 돌이 된다
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고정희 시인 / 실락원(失樂園) 기행(紀行) 1
한 숲에 도는 바람일지라도 부는 바람에 따라 쓰러짐이 다르다 부는 바람에 따라 아픔이 다르다 부는 바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다
그대여 우리가 오늘 한 숲 한 바람 되어 한 하늘에 넘치는 소리이고저 한 하늘 사랑하는 강물이고저 한 하늘 떠받치는 뿌리이고저 다르게 길든 음악을 떠난다
유년시절 별밭에 이는 바람 한 꼭지 신들린 달빛처럼 앞서고 있구나 3월인가보다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고정희 시인 / 실락원(失樂園) 기행(紀行) 3
화계사 북소리 저승문 두드리는 밤 일곱시 (저승의 잡귀들도 사슬을 푼다는 밤 일곱시) 잠시 마음에 채인 족쇄를 풀며 그대여 아무도 모르게 내가 운다 아무도 모르게 그대 우는 소리 듣는다
이 어둔 동굴 밖에 비가 내리고 그대 끈끈한 기도보다 무거운 바람이 불고 상한 짐승들 외로운 밤에, 아아 동굴 속에 한 사람 상한 짐승처럼 피 흘리는 또 한 사람 족쇄 소리 잘랑이며 걸어오누나 이상주의(理想主義) 목발로 걸어오누나
듣는가 그대여 갈가마귀 날으는 들판으로 가슴을 열면 천 번도 더 서걱이는 갈대 우주 담아도 일어서는 벌판 우리는 왜 불일 수 없는가 우리는 왜 합일일 수 없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샘물일 수 없는가
가까이 오라, 그대여 들꽃보다 쓸쓸한 영혼의 뿌리 죽어서도 한(恨) 못 푸는 외로움이라면 천 번도 더 타오르고 싶구나 한때 우리들의 피를 부풀린 사제(司祭)의 축복과 종소리 다 어디로 가고 뼛속까지 흔들리는 그대와 나 꿈의 등대 하나 켜다 죽고 싶구나 불붙는 요(窯)에 사슬을 녹이고 들판 너머까지 밀리는 빛 떠도는 원귀들도 잠재우고 싶구나 이상주의 목발의 그대와 나
한국대표시인 100인선집 90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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