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하 시인 / 저자에 들어가 손을 내리다
맨가슴 벗은 발에 흙먼지 덮어쓰고 웃음 가득 띄우고 마을 찾아 들어온다 신선의 비결 따위 쓰지 않아도 마른 나무에 봄이 오면 꽃이 피듯 하리라 ―소노래 열째
시끄럽다!
애린, 실천문학사, 1987
김지하 시인 / 줄탁
저녁 몸 속에 새파란 별이 뜬다 회음부에 뜬다 가슴 복판에 배꼽에 뇌 속에서도 뜬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사랑이여 탄생의 미묘한 때를 알려다오
껍질 깨고 나가리 박차고 나가 우주가 되리 부활하리.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김지하 시인 / 중심의 괴로움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중심의 괴로움, 솔, 1994
김지하 시인 / 지리산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사ㅍ 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저 대 밑에 저 산 밑에 지금도 흐를 붉은 피
지금도 저 벌판 저 산맥 굽이굽이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것이여 깃발이여 타는 눈동자 떠나던 흰옷들의 그 눈부심
한 자루의 녹슨 낫과 울며 껴안던 그 오랜 가난과 돌아오마던 덧없는 약속 남기고 가버린 것들이여 지금도 내 가슴에 울부짓는 것들이여
얼어붙은 겨울 밑 시냇물 흐름처럼 갔고 시냇물 흐름처럼 지금도 살아 돌아와 이렇게 나를 못살게 두드리는 소리여 옛 노래여
눈 쌓인 산을 보면 피가 끓는다 푸른 저 대사ㅍ을 보면 노여움이 불붙는다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가슴에 굽이친다 지리산이여 지리산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책들
책들은 웅장하다 모든 책들은 질서를 갖기 때문에 나보다는 웅장하다 비극적인 명성을 꿈꾸고 마릴린 몬로와의 있을 법도 않은 간통을 꿈꾸고 벌거벗고 빨고 핥고 그러나 새카만 옷 속의 볕에 탄 아도니스의 몸을 꿈꾸고 동시에 혁명을 혁명의 비극적인 명성을 게바라를 꿈꾸는 그런 나보다는 웅장하다
나에겐 이제 질서가 없다 하루살이만한 질서도 없다 다만 책을 읽을수록 바보가 된다는 모택동을 소주 이홉에 타서 위로한다 책에 짓눌린 모든 이해 못한 책들에 억눌린 나의 불쾌감을 상상의 고갈을 위로한다
무엇이 될까? 하루살이 벼룩 빈대 모기 그보다도 못한 밥벌레겠지 나의 내세(來世)가
내세가 책 속에 있다 그래서 웅장하다 나는 현세조차 모른다
그러나 책들이여 반성하라 책들이여 어째서 너희들의 소리가 없는가 반란이 없는가 거스르는 미친 피 내 손의 피, 내 피의 저 미친, 미친, 미친, 소용돌이치는 저 피가 없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너의 웅장은 어째서 침묵하는가 이 밤에 이 무료함 속에 내 이 불타는 부끄러움 속에마저 책들이여.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김지하 시인 / 쳐라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 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쳐라 쳐라
별밭을 우러르며, 동광출판사, 1989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고니 시인 / 선 외 1편 (0) | 2020.02.14 |
|---|---|
| 김정환 시인 / 우리들의 어머니는 아직 외 2편 (0) | 2020.02.13 |
| 노향림 시인 / 개인병원(個人病院) (0) | 2020.02.13 |
| 박남철 시인 / 방랑자! 외 3편 (0) | 2020.02.13 |
| 고정희 시인 / 서울 사랑 -3- 외 3편 (0) | 2020.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