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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처녀작(處女作)
보리꽃이 피고 살구꽃이 피고 남쪽 섬의 친정집이 그리워서 콧잔등 옷고름으로 찍으며 우는 할머니 고사리 끊으러 간다 핑계 치고 산에 올라 푸른 봉우리에 올라 먼 고향을 바라보면 뭣한디야
열여덟에 뭍으로 시집 와서 지금은 서리 싸인 일흔을 넘으셨나니 발 밑의 산도 둥둥 뜬구름 소갈머리없는 딸만을 낳는다고 남몰래 뱃가죽을 꼬집히기도 했건만 금 같은 아들은 그래도 하나 얻었지
남편은 돈 벌러 일본땅을 돌아다닐 적 겨우 얻어 키워 놓은 아들마저 뜨거운 나라에 징병으로 끌려가고 논두렁마다 밭두렁마다 노을이 떨어져 홀로 땅을 닦으며 살으시다가 해방 맞아선 다시 숨 돌리셨나
한복을 입은 남편과 제대복의 아들이 머리칼 하나 잃지 않고 돌아왔으나 몹쓸 놈의 6․25를 만나 좌익이다 우익이다 하는 판국에 밤낮 이리 몰리고 저리 쫓기어도 (전생에 내 무슨 죄가 있냐) 풀뿌리 씹으며 기침도 크게 못하고 흙 묻은 가슴 자꾸만 두드렸지
그러던 중 하늘한테 아들 빼앗기고 손주 셋은 얻었는지라 손톱 밑에 가시 들어간 줄도 모르고 뒷등엔 후줄근히 땀이 흘렀지만 남자처럼 지게질 쟁기질 다 하고 장날이 되면 보리 두 말 이고 나가 송아지 돼지 데리고 나가 손자 학비를 마련해 보냈지
남 보기 좋은 대학생인 손자놈은 콩잎죽 맛보다 덜한 시(詩)를 쓰는데 고등고시 공부나 한 줄 알고 도깨비불 날으는 산길을 내려오며 주름살 펴 속눈썹으로 웃으시었나 바이블과 맹자(孟子)는 안 읽었어도 자식사랑 이웃사랑 벌레사랑 하면서 고향이라 콧노래 부르는 할머니야
처녀작 고료가 나오는 날 소고기 한 근이나마 사가지고 와 간맞게 맛있게 끓여 줄까 부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칼과 흙
칼과 흙이 싸우면 어느 쪽이 이길까
흙을 찌른 칼은 어느새 흙에 붙들려 녹슬어버렸다.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탄식
우리가 우리의 살덩이를 뜯어먹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노래를 구겨 버리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정신(精神)을 찢어 발기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피눈물을 똥물로 뒤덮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더이상 죽이지 말자 우리가 우리의 숨통을 돼지의 숨통으로 만들지 말자 아아, 우리여 5천 년의 우리여 8년 동안의 우리여 사랑에 둘둘 뭉쳤으면서도 때로는 너무도 부끄러운 우리여 적(敵)들은 밤낮으로 총구멍을 닦고 칼날을 갈고 있는데 적(敵)들은 밤낮으로 우리의 밥과 사랑과 목숨을 엿보는데 아아, 우리여 왜 우리는 우리끼리 싸워야 하느냐 잡아먹어야 하느냐 왜 우리는 역사에 곧잘 절망하고 그것을 글로 쓰고 똥개같이 떠벌떠벌거려야 하느냐 우리여 우리여, 우리들이여! 하나밖에 없는 우리들이여 눈보라여 주먹이여 깨뜨려질 수 없는 핏덩이여!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파도
젊은 날은 어떻게 죽어가고 있을까 옆눈치를 배우며, 혹은 술병 속으로 사라지고 있을지 몰라 나는 시간의 홈에 눌어붙은 조개껍질을 벗겨 버린다 바위 틈에 숨어 있는 두드럭고동을 긁어내거나 거품을 뿜어내는 깨다식꽃게를 날쌔게 잡아 올린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붉고 둥그런 문을 열고 나오는 태양을 향하여 밥이 가득찬 대가리통을 맡긴다. 그리고 다시, 사슬에 묶인 시인(詩人)만이 아는 바다를 본다 푸른 빗자루로 바다를 쓸고 있는 파도를 가차이 따라간다 찢어진 책을, 검은 모자를 쓴 섬과 섬의 오입장이를, 허무와 만나는 지도자를, 눈알이 툭 튀어나온 부랑아를, 뱀상어의 피가 범벅된 어부의 누더기를, 밀수업자의 난파선을, 아름답고 더럽고 무섭고 간질간질하게 쌓인 쓰레기를 푸른 빗자루로 쓸어내는 파도 뒤에 홀로 남아서 만세삼창(萬歲三唱)을 한다 심장을 쑤시며 만세삼창(萬歲三唱)을 부른다 거울처럼 맑디맑게 닦아진 시인(詩人)의 영원한 나라 내 몸뚱어리의 터럭 하나도 뽑아내지 않은 바다여 간밤에 잠든 나의 시(詩)를 입맞추어, 기어이 깨우렷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파랑새
파랑새를 본 사람은 더러 있다고 한다
옛이나 오늘이나 파랑새를 본 사람은 더러 있다고 한다
파랑새…… 그러나 파랑새가 어디에서 죽었는지 보았던 사람은 아직 하나도 없다고 한다.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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