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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밤이 낮을 끌고 간다
밤이 낮을 끌고 간다 아침이 새초롬히, 소녀처럼 끌려 가고 한낮이 햇살 양산을 빙그르르, 다음, 저녁이 아련한 소복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잠옷을 벗고 어둠을 한 세숫대야 씻어낸 사람들이 또 시작이야 아침을 먹고 밤새 널어 놓은 신발을 신고 뛰자 뛰자 집을 나서지만 늘 출발한다고 말하지만 등 뒤엔 언제나 검은 파이프를 문 밤 밤이 낮을 끌고 간다 한낮을 지나 저녁을 지나 술집을 지나 잠자리에 몸을 쾅 눕힐 때까지 밤이 나를 끌고 간다
날마다 낮이 짧아진다 살아볼수록 낮이 짧아진다
매일매일의 밥이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키스가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노동이 끌려가고 매일매일의 시신을 먹고 밤은 배부른 둥근 자석 지구처럼 둥그래 검은 배가 날마다 불러온다
간혹 역사를 읽고 동상을 세우지만 책 속에서 메마르게 떨어지던 낡은 이름 끌려간 한낮은 다시 보이지 않고 오늘 저녁이 또 바삐 끌려간다
우리들의 음화, 문학과지성사, 1990
김혜순 시인 / 부산군 변산면 마포리 하섬
1
보러가자. 정확한 시간은 몰라. 내가 어떻게 지들이 언제 그러고 있는지 알겠어? 바다와 달, 지들끼리 알아서 할 문제야. 우린 그냥 지들이 그러는 동안에 갈라진 바다 사이로 하섬 가면 되는 거야. 생각해봐. 장화를 빌려 신고 갈라진 바닷속을 걷는 거야. 불도 없는 섬을 향해 달빛이 교교히 비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거야. 그리고, 또 다음날 보름달이 바다를 다 마셔 버리면 우리는 또 그 섬을 나오면 되는 거야. 원불교 섬인데 지금 아무도 없어. 갈래? 시인이 그런 데 안 가면 되니?*
2
최소한 베개를 안으면 아프진 않을 텐데 없는 너를 안고 우리는 하섬 간다 징그러워 징그러워 갈망으로 뭉그러진 몸뚱어리인가 보라 군청 주황별들이 떨어져 여는 불가사리의 길을 따라 우리는 하섬 간다 발 밑에서 별 터지는 소리 가슴까지 튀어 오른다 저기 저 돌아보면 하섬도 없고 뭍도 없는데 보이지 않는 달의 손가락이 푸른 바다의 치마를 끌고 어디로 갔는지 내 몸 속에 엉킨 온갖 것들이 물 없는 푸른 바다 깊이 한없이 녹아 내린다
3
우리는 별의 어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구상 모든 별들은 별의 어떤 부분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별의 어떤 속성은 저렇게 태양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들기도 합니다.*
4
흑성동 원불교 회관 지나다보면 하섬 가는 길 떠오른다. 가랑이 사이로 달이 떠선, 바다를 데리고 앞서 가버리고. 하섬 가는 길 열리던. 검푸른 하늘, 별들이 징그러운 징검다리 길을 놓던. 아아 나 모두 녹아내려 아무것도 하섬에 부리지 못했던 그 푸른 물 속 길.
* 이영자의 전화 ** KBS 1, 지구촌 다큐멘터리, 우주의 신비, 1992.5.29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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