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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 / 무제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 바위를, 오늘은 철쭉꽃이 보고
그 철쭉꽃이 시들어 이운 지 천 년이 지난 오늘엔 그 절벽의 소나무가 보고,
그 소나무가 말라죽은 지 또 천 년이 지난 오늘엔 낙락(落落) 가지를 찾아온 학(鶴)이 보고,
그 학이 자취를 감춘 지 다시 천 년이 지난 오늘엔 먼 바다 끝을 넘어온 갈매기가 보고,
그 갈매기가 돌아간 지 또 다시 천 년이 지난 오늘엔
절벽에서 굴러떨어지고 있는 바위가 스스로 제 모습을 보면서…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벽(壁) 1
벽을 타고 올라가는 한 사나이 쇳덩이처럼 찰싹 붙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딛고 오를수록 벽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짙푸른 하늘도 그만큼 높아만 가고, 한 번 숨을 크게 몰아쉬고서는 메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뛸 듯이 그렇게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온몸은 찢겨 떨어지는 살점. 햇빛이 찌르는 한낮, 눈 닦고 보니 벽을 붙어 올라가는 수천의 사나이 짐승처럼 찰싹 달라 붙은 수 천의 사나이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은 고여서 마침내 냇물을 이루리라.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새벽 바다
많은 태양이 죄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 오른다. 일제히 쏘아올린 총알이다. 짐승처럼 우르르 몰려왔다가는 몰려간다. 능금처럼 익은 바다가 부글부글 끓는다. 일제사격(一齊射擊) 벌집처럼 총총히 뚫린 구멍 속으로 태양이 하나하나 박힌다. 바다는 보석상자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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