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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형도 시인 / 가는 비 온다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4.

기형도 시인 /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 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 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그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김(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 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 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奇亨度, 1960.2.16 ~ 1989.3.7]  시인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울한 자신의 과거 체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시를 썼다. 1989년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유고시집으로 시집 『입속의 검은 입』(문학과지성사 1989)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