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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나
내 안에 사지(四肢)를 버둥거리는 어린애들처럼 크고 작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뿌리 그보다도
미닫이에 밤 그림자같이 꼬리를 휘젓는 육근(六根)이나 칠죄(七罪)의 심해어(深海漁)보다도
옹기굴 속 무명(無明)을 지나 원죄(原罪)와 업보(業報)의 마당에 널려 있는 우주진(宇宙塵)보다도
또다시 거품으로 녹아 흐르고 마른 풀같이 바삭거리는 원초(原初)와 시간의 지층을 빠져 나가서 사막에 치솟는 샘물과 빙하(氷河)의 균열(龜裂), 오오 입자(粒子)의 파열(破裂)! 그보다도
광막(廣漠)한 우주 안에 좁쌀알보다, 작게 떠 있는 지구보다도
억조광년(億兆光年)의 별빛을 넘은 허막(虛漠)의 바다에 충만해 있는 에테르보다도
그 충만이 주는 구유(具有)보다도 그 반대의 허무(虛無)보다도 미지(未知)의 죽음보다도
보다 더 큰 우주 안의 소리 없는 절규! 영원을 안으로 품은 방대(尨大)!
나.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나자렛 예수
나자렛 예수!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인가?
마굿간 구유에서 태어나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기구망측한 운명의 소유자,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며 상놈들과 창녀들과 부역자들과 원수로 여기는 딴 고장치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시기를 즐긴 당신,
가난한 사람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에게 우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일을 하다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고 누명을 쓰는 사람들에게 `행복된 사람은 바로 당신들'이라고 `하느님 나라는 바로 당신들 차지'라고 엄청난 소리를 한 당신, 소경을 보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고 문둥이를 말짱히 낫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도
스스로의 말대로 온 세상의 미움을 사고 욕을 먹고, 쫓기다가 마침내 반역자란 누명을 쓰고 볼꼴 없이 죽어간 철저한 실패자,
내가 탯줄에서 떨어지자 맺어져 나의 삶의 바탕이 되고, 길이 되고 때로는 멀리하고 싶고 귀찮게 여겨지고, 때로는 좌절과 절망까지를 안겨주고 때로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판 낯설어 보이는 당신, 당신의 참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
당신은 사상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도덕가가 아니었다. 당신은 현세의 경륜가가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치 않았다. 당신은 어떤 규범을 가르치치 않았다. 당신은 어떤 사회 혁신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 또한 당신은 어떤 해탈을 가르치치도 않았다. 한편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공적이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어느 누구의 과거 죄악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고 당신은 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뒤엎고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고통받는 인류의 해방을 선포하고
다만,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시요, 그지없는 사랑 그 자체이시니 우리는 어린애처럼 그 품에 들어서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서로를 용서하며 우리도 아버지가 하시듯 다함없이 사랑할 때
우리의 삶에 영원한 행복이 깃들고 그것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가르치고 그 사랑의 진실을 목숨 바쳐 실천하고 그 사랑의 불멸을 부활로써 증거하였다.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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