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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자바자바 셔츠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3.

오규원 시인 / 자바자바 셔츠

 

 

자아바, 자아바

쿵(발을 구른다)

고올라, 자바

짝짝(손뼉을 친다)

아무 놈이나

쿵, 짝짝

 

자아바, 자아바

쿵(발을 구른다)

고올라, 자바

짝짝(손뼉을 친다)

 

여기는 남대문 시장 오후의

난장이다 티이를 파는 이(李)씨는

리어카 위에 올라 육탁(肉鐸)을 친다

하루의 햇빛은 쿵 할 때마다 흩어지고

짝짝 손뼉에 악마구리처럼 몰려오고

여자들은 제각기 두 발로 와서

이(李)씨의 가랑이 밑에 허리를

구부린다 엘리제 카사미아 캐논 히포

아놀드 파마 새미나 마리안느를

두 손으로 잡는다 건방진 여자들은

한 손으로 제 얼굴까지 바싹 끌어당긴다

 

상가의 건물은 금강(金剛)의 영혼으로

여자들의 어깨를 짚고

여자들은 우뚝 선 이(李)씨 무릎 아래 엎디어

 

자아바, 쿵

(잡는다)

고올라, 자바

짝짝

(골라 잡는다)

고올라, 고올라

(잽싸게 고른다)

자바자바

(끌어당긴다)

 

여기는 서울의 난장이다

이(李)씨는 잡히는 대로 티이를

구석으로 팽개친다

 

자바자바

그 놈

골라 자바

그 놈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적막한 지상에

 

 

상처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날아오르는 새들

깊고 오래된 메아리 하나처럼

잔 가지 사이로 길의 부리를 묻는구나

 

한 마리의 뱀처럼 기어가는

잠복한 자의 꿈을 본 풀잎이여

들에는 그 꿈속을 달리다가

그물에 걸린 길만 생선처럼 퍼덕이누나.

 

순례, 민음사, 1973

 

 


 

 

오규원 시인 / 절과 나무

 

 

나무 몇 그루가 묵묵히 가지 속에

자기 몸을 밀어넣고 있다

 

그 나무들 위에 절(寺)이 한 채 얹혀 있다

 

나무의 가지 끝까지 올라간 물이

나무에서 절 안으로 길을 내고 있는지

가지가 닿은 벽의 곳곳에 이끼가 끼어 있다

 

양광은 하늘에 가득하고

부처는 절 안에 있고

사람은 절 밖에서 나무에 잡혀 있다

 

바람이 불어도 절은 뒤에 있는

하늘에 붙어

흔들리지 않는다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 오규원, 문학과 지성사, 1999년

 

 


 

 

오규원 시인 / 죽고 난 뒤의 팬티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오규원 시인 / 진실로 우리는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이웃 연탄집 아저씨의 웃음이

매일 조금씩 검어지는 것도

연탄들이 연탄집의 방향을

산간지방으로

차츰 바꾸고 있는 것도.

 

연탄이 연탄집의 아저씨를

감화시키는 사실을 모르듯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진실로

물드는지 모르고 있다.

 

연탄집의 햇빛은

연탄가루 때문에

조금씩 엷어져가고.

 

순례, 민음사, 1973

 

 


 

 

오규원 시인 / 코스모스를 노래함

 

 

거리에서, 술집 뒷골목에서, 그리고 들판에서 가을은 우리를 역사 앞에 세운다.

 

거리에서 가을은 느닷없이 1906년 2월 1일, 일본이 한국(韓國)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한 일을 아느냐고 묻는다. 술집 뒷골목에서 조금씩 비틀거리는 내 앞을 가로막고 1960년 4월 25일에 대학교수단 데모가 있었다고 말한다.

 

1960년 5월 29일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亡命)하고, 1910년 6월 24일에는 구한국(舊韓國)이 일본에 경찰권을 이양, 1885년 10월 8일에는 일본인이 민비(閔妃)를 살해, 1905년 11월 4일에는 민영환이 자살, 1947년 12월 22일에는 김구가 남한 군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는데,

 

다시 보라고 하는구나.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한 자질구레하기만 한 우리의 집 뒤와 골목에서, 느닷없이 또는 고통스럽게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걸어간 발자국을 되살려놓고 우리들이 잊을까봐 저기 저렇게 가을이 해마다 보여주는, 죽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의 찢어진 옷이며 살점이며 피, 핏방울……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본명은 규옥(圭沃)이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과 시선집 『한 잎의 여자』 그리고  유고시집 『두두』가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