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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림 시인 /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3.

이가림 시인 /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까마득한 높이에서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산산조각 제 몸을 땅에 바친다

아까울 것 하나 없는 운명이라는 듯

제 몸을 바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모여서

더 이상 갈라서지지 않는

하나의 무리가 되어

나아갈 제 길을 스스로 만든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 조그만 것들의 가느다란 소리가

꽉 막힌 하수구를 뚫고 둑을 무너뜨리고

콘크리트 장벽을 허물게 되는 것을

 

하나뿐인 제 몸을 내던져

살갗과 살갗 서로 부비는

저 빛 머금은 눈물 같은

목숨들의 발걸음!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 하늘을 걷는 사람

 

 

한 세상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 되어

온갖 더러운 길 다 쓸고 쓸다가

이제는 큰 발자국 내이며

성큼성큼 구름밭을 걷는

사람이여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땅에 묶여 있는

하늘의 나그네

해질녘 흐릿한 알전등 아래 날아드는

하루살이떼같이

때 절은 드럼통 술상 둘레에

불그레 흔들리는

못난 이름을 그리워

뼈만 남은 한 개 헐벗은 빗자루로 서서

오늘도 손 흔들고 있네

 

채찍 휘감기는 종의 잔등이 되라 하면

그 잔등이 되고

앉은뱅이 업어주는 발이 되라 하면

그 발이 되고

상처가 되고 감옥이 되고 죽음이 되어

떠돌고 또 떠돌다가

마침내 하늘과 땅 함께 걷는

우주의 주인이 되었는가

 

번갯불 번쩍이는 먹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환한 얼굴 하나 보이네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 황토(黃土)에 내리는 비

 

 

동풍이 목놓아 소리치는 날

빈 창자를 쓰리게 하는 소주 마시며

호남선에 매달려 간다 차창 밖 바라보면

달려와 마중하는 누우런 안개

호롱불의 얼굴들은 왜 떠오르지 않는가

언제나 버려져 있는 고향땅

단 한번 무쇠낫이 빛났을 때에도

모든 목숨들은 언문(諺文)으로 울었을 뿐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아우성처럼 내리는 비

캄캄한 들녘 어디선가

녹두장군의 발짝 소리 들려온다

하늘에게 직소(直訴)하듯 치켜든

말없이 젖어 있는 풀들의 머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 황토길 가면

 

 

온 세상 햇빛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떠나신 님 그리워 그리워라

솔바람 타고 떠나가신 님

아지랑이 아른아른 날 부르는데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온 세상 바람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푸르른 들 반가워 반가워라

뻐꾸기 홀로 울음 우는 곳

산 메아리 자꾸자꾸 날 부르는데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남. 2살 이후부터 전주에서 살면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루앙대학교대학원 불어불문학과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 당선. 1973년 첫시집 빙하기(민음사). 그 외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작과 비평사). 슬픈 반도(예전사). 순간의 거울(창작과 비평사). 내마음의 협궤열차(시와 시학사). 바람개비별(시학).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시와 시학사). 에세이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월간미술사). 그외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살라방드르가 사는 곳 등. 한국펜클럽번역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인하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