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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시인 /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까마득한 높이에서 빗방울들이 수직으로 떨어진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다는 듯 해맑은 얼굴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산산조각 제 몸을 땅에 바친다 아까울 것 하나 없는 운명이라는 듯 제 몸을 바친다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모여서 더 이상 갈라서지지 않는 하나의 무리가 되어 나아갈 제 길을 스스로 만든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홈통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 조그만 것들의 가느다란 소리가 꽉 막힌 하수구를 뚫고 둑을 무너뜨리고 콘크리트 장벽을 허물게 되는 것을
하나뿐인 제 몸을 내던져 살갗과 살갗 서로 부비는 저 빛 머금은 눈물 같은 목숨들의 발걸음!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 하늘을 걷는 사람
한 세상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 되어 온갖 더러운 길 다 쓸고 쓸다가 이제는 큰 발자국 내이며 성큼성큼 구름밭을 걷는 사람이여
그러나 그대는 언제나 땅에 묶여 있는 하늘의 나그네 해질녘 흐릿한 알전등 아래 날아드는 하루살이떼같이 때 절은 드럼통 술상 둘레에 불그레 흔들리는 못난 이름을 그리워 뼈만 남은 한 개 헐벗은 빗자루로 서서 오늘도 손 흔들고 있네
채찍 휘감기는 종의 잔등이 되라 하면 그 잔등이 되고 앉은뱅이 업어주는 발이 되라 하면 그 발이 되고 상처가 되고 감옥이 되고 죽음이 되어 떠돌고 또 떠돌다가 마침내 하늘과 땅 함께 걷는 우주의 주인이 되었는가
번갯불 번쩍이는 먹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환한 얼굴 하나 보이네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 황토(黃土)에 내리는 비
동풍이 목놓아 소리치는 날 빈 창자를 쓰리게 하는 소주 마시며 호남선에 매달려 간다 차창 밖 바라보면 달려와 마중하는 누우런 안개 호롱불의 얼굴들은 왜 떠오르지 않는가 언제나 버려져 있는 고향땅 단 한번 무쇠낫이 빛났을 때에도 모든 목숨들은 언문(諺文)으로 울었을 뿐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장삼이사(張三李四)의 아우성처럼 내리는 비 캄캄한 들녘 어디선가 녹두장군의 발짝 소리 들려온다 하늘에게 직소(直訴)하듯 치켜든 말없이 젖어 있는 풀들의 머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 황토길 가면
온 세상 햇빛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떠나신 님 그리워 그리워라 솔바람 타고 떠나가신 님 아지랑이 아른아른 날 부르는데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정다운 목소리 간 곳 없어라
온 세상 바람뿐인 내 고향 황토길 가면 푸르른 들 반가워 반가워라 뻐꾸기 홀로 울음 우는 곳 산 메아리 자꾸자꾸 날 부르는데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수줍은 찔레꽃 울듯 하여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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