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3.

정현종 시인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내 사랑하느니

어디 어느 때의

느닷없는 쓰라림

밤 열두시, 밑도 끝도 없이

지진처럼 몸을 흔들고 지나가는

마음의 파문

뭘 아는 듯한 슬픔

뭘 아는 듯한 공복감

아는 듯한 흔들림

그 모든 걸 합쳐도 이름붙일 수 없는

까닭 없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는

지진과도 같은 파문……

일상의 모든 일이

그것에서 도망가는 일에 지나지 않게 하는

지진으로 지나가는

지층(地層)의 금(金)과도 같은

(아, 노다지를 찾았다!)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무지개나라의 물방울

 

 

물방울들은 마침내

비껴오는 햇빛에 취(醉)해

공중(空中)에서 가장 좋은 색채(色彩)를

빛나게 입고 있는가.

낮은 데로 떨어질 운명(運命)을 잊어버리기를

마치 우리가 마침내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자기의 색채(色彩)에 취해 물방울들은

연애(戀愛)와 무모(無謀)에 취해

알코올에, 피의 속도(速度)에

어리석음과 시간(時間)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

악마의 정열 또는

천사의 정열 사이의

걸려 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바람 병(病)

 

 

저 밖의 바람은

심장에서 더욱 커져

살들이 매어달려 어둡게 하는

뼈와 뼈 사이로 불고

 

그리 낱낱이 바람에 밟히는 몸은

혹은

손가락에 리듬의 금환(金環)을 끼이며

머나먼 별에게 춤추어 보이기도 하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바보 만복이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밝은 잠

 

 

저의 잠은 많이

울고 있다

떠도는 것 중에는 다 스며서

혼자 하품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호주머니 속에 가고 있는 길에도

스며서

반복은 즐거우냐고 묻는

시간의 목소리에

차를 따르는 소리 등으로 응답하며,

결심하지 않아도 오는 잠

그러나 죽음은 누울 데가 없는

바다의 파도의 잠.

 

저의 잠은 많이

울고 있다

밤이 자기의 문을 깊이 잠근 뒤

별빛들이 밤의 잠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꽃처럼 일어난 뒤,

한 아침이 다른 아침에게 가서

빛을 깨우고

아침들은 그때 청명히 일어나

빛을 서로 던지기 시작할 때

저의 잠은 아마 또

조금씩 깨면서 울고 있다

결심하지 않아도 나오는

노래처럼.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