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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내 사랑하느니 어디 어느 때의 느닷없는 쓰라림 밤 열두시, 밑도 끝도 없이 지진처럼 몸을 흔들고 지나가는 마음의 파문 뭘 아는 듯한 슬픔 뭘 아는 듯한 공복감 아는 듯한 흔들림 그 모든 걸 합쳐도 이름붙일 수 없는 까닭 없을 수밖에 없는 마음에 이는 지진과도 같은 파문…… 일상의 모든 일이 그것에서 도망가는 일에 지나지 않게 하는 지진으로 지나가는 지층(地層)의 금(金)과도 같은 (아, 노다지를 찾았다!) 몸을 꿰뚫는 쓰라림과도 같은……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무지개나라의 물방울
물방울들은 마침내 비껴오는 햇빛에 취(醉)해 공중(空中)에서 가장 좋은 색채(色彩)를 빛나게 입고 있는가. 낮은 데로 떨어질 운명(運命)을 잊어버리기를 마치 우리가 마침내 가장 낮은 어둔 땅으로 떨어질 일을 잊어버리며 있듯이 자기의 색채(色彩)에 취해 물방울들은 연애(戀愛)와 무모(無謀)에 취해 알코올에, 피의 속도(速度)에 어리석음과 시간(時間)에 취해 물방울들은 떠 있는 것인가. 악마의 정열 또는 천사의 정열 사이의 걸려 있는 다채로운 물방울들은.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바람 병(病)
저 밖의 바람은 심장에서 더욱 커져 살들이 매어달려 어둡게 하는 뼈와 뼈 사이로 불고
그리 낱낱이 바람에 밟히는 몸은 혹은 손가락에 리듬의 금환(金環)을 끼이며 머나먼 별에게 춤추어 보이기도 하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바보 만복이
거창 학동 마을에는 바보 만복이가 사는데요 글쎄 그 동네 시내나 웅덩이에 사는 물고기들은 그 바보한테는 꼼짝도 못해서 그 사람이 물가에 가면 모두 그 앞으로 모여든대요 모여들어서 잡아도 가만 있고 또 잡아도 가만 있고 만복이 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다지 뭡니까. 올 가을에는 거기 가서 만복이하고 물가에서 하루종일 놀아볼까 합니다 놀다가 나는 그냥 물고기가 되구요!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밝은 잠
저의 잠은 많이 울고 있다 떠도는 것 중에는 다 스며서 혼자 하품하는 사람의 외로움과 호주머니 속에 가고 있는 길에도 스며서 반복은 즐거우냐고 묻는 시간의 목소리에 차를 따르는 소리 등으로 응답하며, 결심하지 않아도 오는 잠 그러나 죽음은 누울 데가 없는 바다의 파도의 잠.
저의 잠은 많이 울고 있다 밤이 자기의 문을 깊이 잠근 뒤 별빛들이 밤의 잠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꽃처럼 일어난 뒤, 한 아침이 다른 아침에게 가서 빛을 깨우고 아침들은 그때 청명히 일어나 빛을 서로 던지기 시작할 때 저의 잠은 아마 또 조금씩 깨면서 울고 있다 결심하지 않아도 나오는 노래처럼.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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