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1-
대구(大邱) 근교(近郊)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2-
한 십 년만에 남쪽 섬에도 눈이 내린 이튿날이다. 사방(四方)이 나를 지켜보는 듯 싶은 황홀한 푼수로는 꼭 십 년전의 그때의 그지없이 설레이던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나 엄살도 없는 지엄(至嚴)한 기운은 바다마저 잠잠히 눈부셔 오는데……
그렇다면, 한 십 년전의 이런 날에 흐르던 바람의 한자락이, 또는 햇살의 묵은 것이, 또는 저 갈매기가, 이 근처 소리없이 죽고 있다가 눈물 글썽여 되살아나는지는 어느 누가 알 것인가.
만일(萬一)에도 그렇다면, 우리의 어리고 풋풋한 마음도 세월따라 온전히 구김살져 오는 것만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바람의 또한 햇살의, 또한 갈매기의, 그중에도 어떤 것은 고스란히 십 년 후에 살아 남았을 것처럼, 흔히는 그 구김살져 오기 마련인 마음의 외진 한구석에 어리고 풋풋한 마음이 한자리하여 숨었다가 기껏해야 칠십년(七十年)의, 그 속에서도 그야말로 이런 때는 희희낙락(喜喜樂樂)해지는 그 것인지도 모른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물먹은 돌밭 경치(景致)
1
돌도 씻기고 바래이면, 죽도록을 그립다사ㅎ는 장천(長天)에 뜨고 싶은 마음이 따로 있을까. ……아마 없으리.
돌들이 그런 대신 또 아무 것도 여기 못 온다. 그득한 바닷물, 바닷바람, 햇빛 별빛 밖에는. 오히려 사는 일끝에 묻은 어려운 먼지가 돌밭 위에 서성이다 하늘로 뜨는 걸 보았다.
2
어느 가을엔 유자(柚子)를 어루만져 껍질안 싱싱한 물을, 또 어느 가을엔 무덤가에서 무덤 속 향뼈를 느꼈으랴. 이 그러나 돌밭을 두기는 두고, 어찌할까, 부처님의 몸으로도 앉을 수는 없을까. ……아마 없으리.
별빛 함께 물빛 머금었을 때의 총총한 눈망울들이, 혹은 햇빛 받은 맑고 밝은 이마들이 하늘이 상하게 아프다 아프다 하리라. 아니, 내 마음 바닷가에도 비단 펼쳐져 있는 이와 같은 돌밭이, 꿈밭이, 무너지리 싶었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밀물결 치마
죽은 남평문씨(南平文氏) 부인(夫人)의 밀물결 치마의 사랑에 속절없이 묻어버리기 마련인 모래밭에 우리의 소꿉질인 것이다. 우리의 어린날의 날 샌 뒤의 그 부인(夫人)의 한결로 새로왔던 사랑과 같이 조촐하고 닿을 길 없는 살냄새의 또다시 썰물진 모래밭에
우리는 마을을 완전히 비어버린 채 드디어는 무너질 궁전(宮殿) 같은 것이나 어여삐 지어 두고 눈물고인 눈을 하고 있던 일이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바다에서 배운 것
고향 앞바다에는 꿈이 아니라고 흔드는 수만 잎사귀의 미류나무도 있고, 미칠만하게 흘러내리는 과부의 찬란한 치마폭도 있고, 무엇도 있고 무엇도 있고 바다에서처럼 어리벙벙하게 많이 있는 것은 없는가.
그러나 나는 한가지 사람이 죽어 비록 형체는 없더라도 남기게 되는 반짝이는 것, 흔들리는 것은 꽃비늘로 환하게 둘러쓸 것을 마흔 한해 동안 고향 앞바다 보고 제일 많이 배운 바이니라.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태일 시인 / 겨울 새 외 3편 (0) | 2020.05.13 |
|---|---|
| 정현종 시인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외 5편 (0) | 2020.05.13 |
| 이가림 시인 / 하나가 되기 위한 빗방울들의 운동 외 3편 (0) | 2020.05.13 |
| 오규원 시인 / 자바자바 셔츠 외 5편 (0) | 2020.05.13 |
| 김밝은 시인 / 플레어스커트 외 1편 (0) | 2020.0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