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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3.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1-

 

 

대구(大邱) 근교(近郊) 과수원

가늘고 아득한 가지

 

사과빛 어리는 햇살 속

아침을 흔들고

 

기차는 몸살인듯

시방 한창 열이 오른다.

 

애인이여

멀리 있는 애인이여

이런 때는

허리에 감기는 비단도 아파라.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무제(無題) -2-

 

 

한 십 년만에 남쪽 섬에도 눈이 내린 이튿날이다. 사방(四方)이 나를 지켜보는 듯 싶은 황홀한 푼수로는 꼭 십 년전의 그때의 그지없이 설레이던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나 엄살도 없는 지엄(至嚴)한 기운은 바다마저 잠잠히 눈부셔 오는데……

 

그렇다면, 한 십 년전의 이런 날에 흐르던 바람의 한자락이, 또는 햇살의 묵은 것이, 또는 저 갈매기가, 이 근처 소리없이 죽고 있다가 눈물 글썽여 되살아나는지는 어느 누가 알 것인가.

 

만일(萬一)에도 그렇다면, 우리의 어리고 풋풋한 마음도 세월따라 온전히 구김살져 오는 것만은 아니다. 헤아릴 수 없는 바람의 또한 햇살의, 또한 갈매기의, 그중에도 어떤 것은 고스란히 십 년 후에 살아 남았을 것처럼, 흔히는 그 구김살져 오기 마련인 마음의 외진 한구석에 어리고 풋풋한 마음이 한자리하여 숨었다가 기껏해야 칠십년(七十年)의, 그 속에서도 그야말로 이런 때는 희희낙락(喜喜樂樂)해지는 그 것인지도 모른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물먹은 돌밭 경치(景致)

 

 

1

 

돌도 씻기고 바래이면, 죽도록을 그립다사ㅎ는

장천(長天)에 뜨고 싶은 마음이 따로 있을까.

……아마 없으리.

 

돌들이 그런 대신 또 아무 것도 여기 못 온다.

그득한 바닷물, 바닷바람, 햇빛 별빛 밖에는.

오히려 사는 일끝에 묻은 어려운 먼지가

돌밭 위에 서성이다 하늘로 뜨는 걸 보았다.

 

2

 

어느 가을엔 유자(柚子)를 어루만져 껍질안 싱싱한 물을,

또 어느 가을엔 무덤가에서 무덤 속 향뼈를 느꼈으랴.

이 그러나 돌밭을 두기는 두고, 어찌할까,

부처님의 몸으로도 앉을 수는 없을까.

……아마 없으리.

 

별빛 함께 물빛 머금었을 때의 총총한 눈망울들이,

혹은 햇빛 받은 맑고 밝은 이마들이

하늘이 상하게 아프다 아프다 하리라.

아니, 내 마음 바닷가에도 비단 펼쳐져 있는

이와 같은 돌밭이, 꿈밭이, 무너지리 싶었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밀물결 치마

 

 

죽은 남평문씨(南平文氏) 부인(夫人)의

밀물결 치마의 사랑에

속절없이 묻어버리기 마련인

모래밭에 우리의 소꿉질인 것이다.

우리의 어린날의

날 샌 뒤의 그 부인(夫人)의

한결로 새로왔던 사랑과 같이

조촐하고 닿을 길 없는 살냄새의

또다시 썰물진 모래밭에

 

우리는 마을을 완전히 비어버린 채

드디어는 무너질 궁전(宮殿) 같은 것이나

어여삐 지어 두고

눈물고인 눈을 하고 있던 일이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바다에서 배운 것

 

 

고향 앞바다에는

꿈이 아니라고 흔드는

수만 잎사귀의 미류나무도 있고,

미칠만하게 흘러내리는

과부의 찬란한 치마폭도 있고,

무엇도 있고 무엇도 있고

바다에서처럼 어리벙벙하게

많이 있는 것은 없는가.

 

그러나 나는 한가지

사람이 죽어

비록 형체는 없더라도 남기게 되는

반짝이는 것, 흔들리는 것은

꽃비늘로 환하게 둘러쓸 것을

마흔 한해 동안 고향 앞바다 보고

제일 많이 배운 바이니라.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