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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테크노피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4.

오규원 시인 / 테크노피아

 

 

테크노피아

야립간판(野立看板)의 녹슨

철골 사이에

 

들새 하나

집을 틀고 앉아

새끼를 기르겠다고

작은 눈을 굴리며

알을 품고 앉아

 

형체도 분명한

다섯 손가락의 외짝

고무장갑

썩지도 못하고

비를 맞는

 

테크노피아

야립간판(野立看板) 아래와

비 함께 맞으며

알을 품고 앉아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1991

 

 


 

 

오규원 시인 / 편지지와 편지봉투

 

 

당신의 편지를 오후에 받았습니다

그래도 햇빛은 뜰에 담기고 많이 남아

밖으로 넘쳤습니다

내 손에서는 사각사각 소리가 났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사각봉투였습니다

사각봉투 끝은 오후의 배경을 가리켰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A4용지였습니다

A4용지는 단정하고 깍듯했습니다

A4용지는 나의 그늘은 잘 담기었지만

바람은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두 겹으로 하얗게 접혀 있었습니다

 

 


 

 

오규원 시인 / 하늘과 두께

 

 

투명한 햇살 창창 떨어지는 봄날

새 한 마리 햇살에 찔리며 붉나무에 앉아 있더니

허공을 힘차게 위로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을 열고 들어가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파랗게 하늘이 되었습니다

오늘 생긴

하늘의 또다른 두께가 되었습니다

 

 


 

 

오규원 시인 / 하늘과 침묵

 

 

온몸을 뜰의 허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한 사내가 하늘의 침묵을 이마에 얹고 서 있다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힌다

침묵은 돌에도 잘 스민다

사나의 이마 위에서 그리고 이마 밑에서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

그 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좌우로 물살을 나누며

사내 앞까지 와서는 급하게 우회전해 나아간다

그래도 침묵은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

사내는 몸속에 있던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

뜰 위에 놓고 말이 없다

그림자에 덮인 침묵은 어둑하게 누워 있고

허공은 사내의 등에서 가파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맹이』 , 오규원, 문학과 지성사, 2005년

 

 


 

 

오규원 시인 / 한 나라 또는 한 여자(女子)의 길

 

 

양평동(楊平洞)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영등포(永登浦). 영등포(永登浦)에서 11시 열차로 사랑하는 서울을 떠남. 내 사랑은 두고 서울만 떠남. 좌석이 없어 입석을 구입, 맥주를 마시는 핑계로 식당차에 편히 앉음. 떠나며 돌아보니 속옷 바짓가랑이가 다 나온 영등포(永登浦)가 떠나는 나를 보더니 한 번 픽 웃고 돌아섬. 떠남. 역사의 서울, 꿈의 서울, 여자의 서울.

 

13시 대전 도착. 문화인의 긍지를 살려 즉시 커피부터 한 잔 들이켬. 대전 ― 감흥 없이 올라타지는 여자, 그저 그렇게 대전의 몸을 한두 시간 올라타 흔들거림. 대뇌의 전두엽 어느 부위에선가 나사가 하나 빠져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음.

 

발부리를 잡아 공주산성(公州山城)에 오름. 동물이라고는 나 한 마리. 나머지는 모두 공주산성(公州山城)임.

당갑사 중치마 붉어서 좋고

백화나 단속곳 넓어서 좋아

이 염요(艶謠)를 부르던 금강의 백성(百姓)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음. 나 혼자 그 염요(艶謠)의 단속곳에 일박(一泊)함.

 

밤이 되니 내 사랑하는 서울 떠오름.

속옷이 다 나와서 오히려 그녀다운 그녀. 속옷이 저희들끼리 축복하느라고 펄럭임. 내 사랑 서울에 대한 나의 밤 인사는 다음과 같음. 오늘밤도 어제와 같이 속옷을 벗겨주는 사내를 꼭 구하소서.

 

□ *

 

나에게는 어머니가 셋. 아버지는 여자(女子)는 가르쳐주었어도 사랑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사랑이란 말을 모르고 자란 아버지와

사랑이란 말을 모르고 죽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나라.

 

그 나라에 적당하게 자리잡은 여자(女子)가 셋. 둘은 무덤 속에. 그리고 사라져버린 한 여자(女子).

 

무덤을 딛고 내가 올라서니

두 개의 길이 보이는구나

사랑을 알기에는 너무 단순한

한 나라의 길과

사라져버린 한 여자(女子)가 혼자 걸어간 길.

 

나에게는 어머니가 셋. 어머니가 많아 행복하다.

어머니, 내 어릴 때부터의 모순의 나무. 그 나무들의 그늘 밑에서 나는 동화책을 읽었다. 왕자(王子)는 왕(王)이 죽을 때까지 어릴 필요가 있는 왕(王)의 나라 이야기, 아버지보다 먼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술이 담배가 여자(女子)가 필요하다는 왕(王)의 나라 이야기.

 

모순 ― 나에게는 그러나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나라. 시장(市場)이 큰 중동(中東)의 무더운 흙냄새가 바람을 일으키는 나라. 발레리의 안경을 수리해준 나라.

 

이 나라에서 지금도 나는 동화책을 읽는다. 군신유의(君臣有義), 장유유서(長幼有序),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의 동화. 떼를 지어 숲속에 노니는 의(義)․서(序)․친(親)․별(別)․신(信). 숲의 나무들이 부르는데, 아 어디로 갔나 여기 있어야 할 사랑 애(愛). 충(忠)․효 (孝)는 지금도 있는데, 아 어디로 갔나. 사랑 애(愛), 미운 오리새끼.

 

□ *

 

주막(酒幕) 작부(酌婦) 웃지 않음. 옛 독노국(瀆盧國), 유민(流民)과 유배인(流配人)의 고독한 땀냄새가 나는 바닷가, 거제(巨濟)의 갈도주막(葛島酒幕)에 앉아 나는 무슨 노래를 들었던가.

 

장가라고 가노라니 첫날밤에 해산했네

오늘왔던 새신랑아 술이나빠 가실라요

안주나빠 가실라요

술도싫고 안주도 내사싫소

오늘왔던 새매부야 술이나빠 가실라요

안주나빠 가실라요

술도 내사싫고 안주도 내사싫소

병풍 뒤에 우는 애기 젖 달라고 깽깽 우네

냇물 같이 흐르는 젖 조랑 말고 젖 주어라

아이구답답 서방님아 기어코 갈랴거든

아이이름 지어주소

애기 애비 어디 가고 내가 이름 지어줄꼬

 

베개를 고쳐 누워도, 고쳐 누워도 허리가 아픈 바다.

아, 어디로 갔나. 사랑 애(愛), 미운 오리새끼.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본명은 규옥(圭沃)이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과 시선집 『한 잎의 여자』 그리고  유고시집 『두두』가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