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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벌레들의 눈동자와도 같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4.

정현종 시인 / 벌레들의 눈동자와도 같은

 

 

  둥근 기쁨 하나

    마음의 광채

  둥근 슬픔 하나

    마음의 광채

  굴리고 던지고 튕기며 노는

  내 커다란 놀이

 

  이만큼 깊으니

    슬픔의 금강석

  노래와 더불어

    기쁨의 금강석

  지구와도 같고 혈구(血球)와도 같으며

  풀잎과도 같고 벌레들의 눈동자와도 같은

  둥근 슬픔

  둥근 기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보살 이유미

 

 

  보살 이유미는 오늘도

  밥을 해 놓고 기다린다.

  다른 집 식구들을 기다린다.

  이 일미(一味) 보살에게는

  밥에 관한 한은

  내 식구 네 식구가 없다.

  내 집 남의 집이 없다.

  그리하여 항상

  밥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세상 사람들을 모두

  먹이고 싶을 따름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밥때가 되면 이집 저집이 모두

  우리집이었듯이 보살 이유미네 식탁에는

  항상 이 세상 걸신들이

  앉으실 자리가 있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누구나 신이 된다.

  신앙의 큰 원천, 걸신.

  보살 이유미는 그 앞에

  오늘도 밥을 떠놓는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그 어떤 때거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그게 저 혼자 피는 풍경인지

내가 그리는 풍경인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한 때는 없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사랑 사설(辭說) 하나

 

 

사물을 가장 잘 아는 법이 방법적(方法的) 사랑이고 사랑의 가장 잘 된 표현이 노래이고 그 노래가 신나게 흘러다닐 수 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형은 어떤 사랑을 숨겨 지니고 있습니까?

 

어제 형은 형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온 땅이 거울이 되어 하늘이 다 비취고 있는 데를 걸어갔다, 거울인 땅 위를 걸어갔다, 안 팔리는 꿈을 향해 꼭두새벽 꼭두대낮 거듭 걸어갈 때 자기의 모양은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누구나 거기서는 나그네되는 항구, 항구의 고향인 바다와 그리운 꿈만 보이는 식으로 자기가 안 보이는 게 즐거웠다(그런데 거울인 땅 위에 자기의 모양이 비취인 건 침뱉기 위해 몸을 굽히거나 구두끈을 매기 위해 허리를 꺾거나 할 때였으며)……밤이 되자 별들은 무덤의 입술을 빨고 무덤들은 별들의 입술을 빨고 있었으며, 천지간의 바람은 바람 자신의 대(代)를 잇기 위해 끊임없이 불고 있었으나 오히려 시인(詩人)의 눈에 눈물 고이고 귀에 소리 고이게 하기 위해 불고 있었고 그러나 잠들어 눈 어둡고 귀 닫은 이 많아 그들이 깨어날 때까지 불 작정으로 불고 있는 듯했으며……그때 어떤 소리가 말했다, 오늘의 시의 운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쪽박으로 구걸하는 거지 자기의 명성(名聲)의 쪽박으로 구걸하는 건 아니다, 죽음으로 구걸하는 거지 살아남음으로 구걸하는 건 아니다,  명성 등(等)은 그대의 이름을 쭉정이화하는데 기여하는 것임을 그대는 그대의 그야말로 명성을 위해 알아두어라, 사람은 각자 자기가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 이상의 사랑을 (  )로부터 항상 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그가 삶의 현상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가 두루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은 사랑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사랑받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고 항상 그대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으면 된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시(詩)에서 그대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고통과 자신의 죽음을, 문화를, 방법적 사랑을 놓지 않으려느냐, 슬픔 다사(多謝).

 

잠이 깨었으나 형의 꿈은 더 깊어갔습니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이가 플라스틱 악기를 부―부―불고 있다

아주머니 보따리 속에 들어 있는 파가 보따리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다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뛰어오신다

무슨 일인지 처녀 둘이

장미를 두 송이 세 송이 들고 움직인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여

아주머니 밤 보따리, 비닐

보따리에서 밤꽃이 또 막무가내로 핀다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사물(事物)의 꿈 1

 

 

그 잎 위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비비며 나무는

소리 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생(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사물(事物)의 꿈 2

― 해는 왜 지는가

 

 

  사랑하는 저녁 하늘, 에 넘치는 구름, 에 부딪쳐 흘러내리는 햇빛의 폭포, 에 젖어 쏟아지는 구름의 폭포, 빛의 구름의 폭포가 하늘에서 흘러내린다, 그릇에 넘쳐 흐르는 액체처럼 가열(加熱)되어 하늘에 넘쳐 흐르는 구름, 맑은 감격에 가열된 눈에서 넘치는 눈물처럼 하늘에 넘쳐흐르는 구름.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