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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규 시인 / 공주
형수는 왜 사과를 얼려서 먹을까 조카들의 머리맡에 그림 동화를 펼쳐 놓고 독 묻은 사과를 먹을까 거울도 잠든 고요한 밤 연탄 구멍을 힘들여 맞추고 얼굴이 그을러 돌아왔을까 이 시간 기다리는 것은 취한 형이 아닐 테지 유리창은 두터운 커튼색 어둠이 둘러쳐져 있고 돌아누워도 꿈은 마음대로 꾸어지지 않는군 그럼 한때의 불문과 여대생 형수 문리대의 여왕 형수는 녹색 왕관을 훔쳐 흔들며 숲 속을 건너갔을까 왔을까 희귀한 외국어 동화책이 원본으로 이곳에 남아 있을까 학생들은 이편에서 저편까지 미끄러져 가고 도서관 복도마다 거울은 쓸쓸히 잠들었군 그 날 이후 겨울이 올 때는 언 사과를 먹으며 백년 동안 잠자는 나라의 공주를 생각할까 그림 속 난장이들은 일찍일찍 죽고 빈 동화집을 지키는 형수 자색 베개를 가슴 밑에 깔면 방은 조금씩 더워 오는데 이빨은 왜 이리 덜덜 떨리고 사방은 차디 찬 얼음일까 기다리는 이는 예쁜 형일까 불 갈아 넣는 새 아침인가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박덕규 시인 / 그리운 풍경
지방 행정 회관 202호 원고와 씨름하다 한바탕 긴 기지개로 피로를 내쫓는 순간 유리창 밖 허공에서 발 하나가 둥둥 떠 내려온다 하나만이 아니다 또다른 발과 다리와 몸뚱아리가 줄 끝에 매달려 앉아 흔들흔들 내려오고 있다 사내는 볕이 따가운지 상을 찡그리면서 그러나 연신 입을 벌렸다 다물면서 소리 없이 창문을 닦기 시작한다 겨울의 묵은 때가 씻겨져 내린다 사내의 등 뒤로 만리동 고개 쪽이나 아니면 숙대 뒷산까지 올망졸망 치솟아 오른 달동네 장난감 집들이 보인다 효창동과 공덕동 혹은 만리동 사이 보이지 않는 도로를 버스 지붕 몇 개가 끊기고 이어진다 효창 공원을 끼고 도는 아스팔트길 붕어 새끼 같은 아이들 뜀박질 여기저기 교회의 첨탑이며 삐쭉 솟은 전신주며 안테나며 옥상에 나부끼는 빨래들이며 붉은 개량 지붕 위로 뿜어지는 갸륵한 연기며 축축 처진 전깃줄이며 들려 오지 않는 아우성들이며 사내는 풍경을 닦는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힐끗힐끗 실내를 엿보면서 창을 닦아 내린다 두터운 유리창은 아무런 반향도 들려 주지 않는다 히터 도는 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마른 기침 소리며 철제의자 삐걱이는 소리 가스라이터 켜는 소리 원고지 찢기는 소리가 들린다 사내는 점점 아래로 내려간다 허공을 떠돌며 순간의 위험스런 곡예를 즐기듯 한껏 입 벌리며 웃는다 사내의 마지막 머리카락이 위로 뻗히며 풍경만이 남는다 이른 봄 긴 하품에 눈물이 흐른다 문득 가을이 아니 지나간 겨울이 다시 그리워진다 그립다 지방 행정 회관 202호 역사 문학 연구소 왕조 실록과 원고지와 극적 구성과 전화벨 소리와 코피잔과 약속과 나른함과 독촉과 삐걱임 기침 소리 찢기는 소리 하품 소리 하품 소리 아아 아직은 저렇듯 저렇듯 섣불리 풍경이 맑아져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사냥, 문학과지성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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