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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여원 시인 / 물푸레 동면기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4.

이여원 시인 / 물푸레 동면기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이여원 시인 / 종소리와 가시

 

 

손끝에 가시가 박히고

가리키는 곳마다 아프게 하기를.

 

넝쿨모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엉켜서 우리는 열 개의 가시를 꼭 움켜쥐고 불화한 시간들을 나열하며 하나의 가시를 뺄 때마다 손끝에선 원수진 사람의 혈액형으로 피가 흘렀다.

 

기다리다 지치면 산이 바다가 되는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

 

봄이 되면 가시들도

물이 올라 통통해지고 온순해진다.

 

가시들이 책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깨진 창문에서 빛이 꽃처럼 떨어졌다.

어떤 질문을 섞었는지

너는 알고 나는 모른 척 할 것이다.

 

상처 난 사건들의 흉터를 매만진다. 그리고 홍수처럼 떠내려가기도 하고 나무 꼭대기 위에서 까치가 크게 웃는 날도 있었다. 무서운 것은 무심해지는 것. 가시를 꽃으로 키우면 되는 것이다.

 

손가락질을 받고서라도

가끔은 가시처럼 살고 싶을 때

 

아무도 건들이지 못하는 가시덤불처럼 가을의 독 오른 가시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날마다 가시가 종소리처럼 피어난다.

 

울산 『매일신문』 2019년 발표

 

 


 

이여원(李如苑) 시인

진주에서 출생.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빨강』(현대시, 2019)가 있음. 2015년 제16회 시흥문학상 수상. 2018년 아르코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