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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현정 시인 / 네페르타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4.

오현정 시인 / 네페르타리

 

 

내 이름엔 뱀이 머리가 된 독수리가 앉아있어요

긴 혓바닥은 해를 깨워 칭얼대는 파라오에게 두 눈과 귀를 한껏 열게 하죠

포도주에 뱀독을 약간 넣어 물려도 죽지 않게 그를 지키고

왕의 안식을 궁리하다 단잠에 빠진 그를 영원처럼 품어주었죠

 

덜컥대는 좁은 야간침대기차를 타고 밤새 내 이름의 상형문자를 풀어온 당신

람세스 2세와 마주 선 나를 읽고 그의 입술을 문댄 검지를 내 입속에 넣어주었죠

순간 채도가 살아나는 나의 두 팔과 도끼와 집게와 그릇을 봐요

바라만 보던 거리가 이제 포개졌어요

내 손가락은 종달새로 빵을 구워요

 

람세스 2세는 나를 태양신의 아내 하토르와 나란히 올리고 싶었나 봐요

왕가의 계곡 중에서도 가장 음부에 내 무덤을 숨기고

사람들의 숨결과 스마트폰의 광채를 피해 오래오래 내 모습을 지켜주었죠

아직 다 풀지 못한 비밀은 당신이 구워본 에이슈 발리디 빵 속에 채우세요

 

두 눈동자에 새겨진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처럼

불을 먹고 불춤을 추는 베두인의 허리로

맨발로 홍해에 돛을 펼치는 펠루카의 휘날리는 머리카락에

터번을 쓰고 히브리 노예의 피땀이 쌓은 피라미드의 테러에서 살아남은 돌

바로 당신이예요, 바람이 돌 귀퉁이 밀면 스핑크스가 당장 날아올 거예요

 

돌아가는 길에 카이로의 시장 골목길에 있는 엘 피샤이 카페에 들르세요

소설가 나기브 마푸즈가 시간의 창고에서 당신을 만나러 올 거예요

그에게 물담배를 권하고 아부심벨의 왕비 네페르타리에게 못다 한 질문을 이어 가세요

아마 한 하릴리 시장의 미로를 빠져나오기 전에 코란을 새긴 패널을 사라고 할 거예요

모스크의 아잔이 울리면 사랑의 신 하토르가 된 나를 생각하며 가슴에 양팔을 얹어요

 

신은 인간이 만든 걸작품, 유한한 목숨에 영생을 불어넣는 당신 안에서 함께 숨쉬고

당신은 고양된 이 기쁨을 산등성이 잇는 들의 입김으로 전하며 우리는 불멸의 길을 가요

이집션이 ‘꼬리’라 부르는 당신, 참 멀리서 나를 만나러 와서 정말 반가웠어요

슈크란*, 오래 기다린 사람이 진솔한 친구가 된다지요

뱀과 독수리가 들을 수 없는 당신 이름을 알고 싶어요, 나의 오아시스   

 

*슈크란: ‘감사합니다’의 아랍어

 

계간 『미네르바』 2019년 봄호 발표

 

 


 

 

오현정 시인 / W.W.W. 시대

 

 

빈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계신 분

고맙습니다 쪽으로 오셔서 서로 사랑하세요

 

달라이라마와 추기경은 멀리서도 서로의 방향을 주시하고 만지죠

서로 잘 났다고 다투지 않는 주머니 속의 나침반은 친구가 되는 지름길이죠

 

탈진할 때까지 중생을 위해 간구하는 살아있는 부처님

폭력 없는 쪽으로 가셔서 서로 긍휼히 여기세요

 

열리고 닫힘이 거침없는 고수는 어디서든 통하는 친구가 될 수 있죠

큰 바다는 모자를 써도 젖지 않는 화평의 내일로 찰랑거려요

 

지금은 촘촘한 거미줄로 관계망을 짠 월드 와이드 웹 시대

아무도 그물에 걸리는 잔챙이가 되고 싶지 않죠

 

기다리지 않고 붙잡지 않죠

질문 속 동서남북 방위의 정답만 필요해요

 

길 잃은 마음이 점점 으슬으슬해지는 이천 년

기계 속에 투영되는 나비의 불꽃을 지펴요

 

자침이 흔들리지 않는 은하의 공간을 붙잡고

물과 불의 자석이 된 고즈넉한 성곽 축을 걸어요

 

화살벌레 한 마리 휘익 지나가요

 

계간 『애지』 2020년 봄호 발표

 

 


 

 

오현정 시인 / 아찔한 질서

 

 

기린이 선 채로 2미터 높이에서 새끼를 낳자 야생의 풀밭이 느긋하게 받아 안는다

꼼틀거리는 여린 숨결 못들은 척 어미는 앞발로 걷어찬다

 

일어서지 않으면 너도 하이에나의 먹잇감에 지나지 않아

 

어미는 뒷발로 어린 것을 연방 걷어찬다 일어나 걸어, 뛰다보면 날고 있을 거야

바람을 거느리고 어미와 새끼가 서로의 눈동자 놓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들의 속살을 베는 자연의 사슬이 맵다

 

세렝게티 평원의 구름눈망울은 기하학의 神이다

 

긴 목을 등에 붙이고 다리를 오그려 깊은 잠에 빠지지 않는다 어미 기린의 선잠은 광활한 들판을 지킨다 낙법은 영역을 지키고 넓히는 모성, 풀씨도 차례를 지켜 발을 구른다

 

계간 『애지』 2020년 봄호 발표

 

 


 

오현정(吳賢庭)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숙명여대 불문과 졸업. 1978년, 1989년『현대문학』 2회 추천완료로 등단. 시집으로 『몽상가의 턱』, 『광교산 소나무』, 『고구려 男子』, 『봄온다』, 『물이 되어, 불이 되어』, 『에스더 편지』, 『마음의 茶 한 잔․기타 詩』,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라데츠키의 팔짱』 등이 있음. PEN문학상, 월간문학동리상, 들소리문학대상, 중국장백산세계문학상, 애지문학상 등 수상. 현재 한국문협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이사. 문학의 집 서울, 숙명문학인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