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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범 시인 / 1월
당신은 조금 더 늙었고, 이전의 것들은 모두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저물녘이 사라지려 할 때 어둠은 어느 곳을 배회하는가. 그러나 당신은 남해의 섬을 바라보며 지나간 것들을 애써 호명하려 하지 않는다. 당신은 조금 더 늙었고, 신성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일몰은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해안선을 따라 씻기지 않는 피비린내는 누군가의 전생을 흐느끼려 하는가. 실패한 상륙작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무너진 다리마다 오래전에 사라진 이들의 흐느낌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당신은 초등학교 교정의 텅 빈 그네와 침묵을 거듭하는 누군가의 동상을 떠올리려 한다.
회고할 수 없는 과거만이 당신의 미래를 예감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회한 따위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다. 세상은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니 당신은 이제 조금 더 늙어버린 당신의 미래를 어루만지기로 한다. 사이렌이 울리는 거리마다 국경일의 추모객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슬픔은 이제 쓸모없는 사랑처럼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당신은 조금 더 늙었으므로, 해안선의 출렁이는 파도와 어둠이 장악하기 시작하는 수평선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늙어가는 개와 산책하는 밤이 깊어가면 이웃들의 죽음은 어느새 당신 앞에 당도하는가.
몰락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조금 더 늙어버린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끝도 없이 침묵하는 것은 과거인가 미래인가 아니면 말을 잊은 당신의 음성인가. 그러나 당신은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한다. 당신은 그저 조금 더 늙어갈 뿐이고, 장례식장을 나서는 순간 잊히는 모든 슬픔처럼 과거와 미래는 떠올리지 않기로 한다.
이별을 준비했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익숙하다.* 이전의 모든 것들을 후회하지 않기로 한 당신의 다짐 역시 매일 밤 유효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고요하고 거룩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오늘밤은 당도할 것이다. 그곳에는 어느새 조금 더 늙어버린 당신이 있다. 연인의 손을 잡고,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 당신이 있다.
* 페이스북의 글을 페부커의 동의를 받고 인용함
월간 『현대시』 2019년 3월호 발표
조동범 시인 / 동물원과 기린과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
모든 것은 불안과 질투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언제나 다정하고
동물원의 사육사만이 믿을 수 없는 거대한 슬픔과 마주한다 기린은 목을 빼고 닿을 수 없는 높이가 되어가는 데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아무도 걷지 않는 밤이다
창밖에는 그저 버려진 캔들만 굴러다닐 뿐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단단한 연대를 버리지 못하고, 그러나 오래지 않은 추억은 잊을 수 없는 슬픔을 소환하기도 한다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동물원의 입구에서 망설이는데 동물원의 매표원은 친절하고
기린의 목이 저물녘을 향해 조금 더 길어진다 기린의 목이 길어지면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어쩌면 슬픔과 상처 쪽으로 걸어갈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부터 슬픔이 오는지 알지 못하므로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결코 이별을 노래하지 못한다
나는 기린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알고 있다 기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다정하고 그러나 그는 매일 밤 기린의 슬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술을 마신다
고통 속에 기쁨이 없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기린이 당신의 뺨을 핥는다면 당신의 심장을 나는 두근거릴 수 있는가
폐장 시간이 다가온 동물원은 아직도 어둠이 익숙지 않으며 기린의 목은 아직 충분히 길지 않으므로 연인들은 언제나 다정한 연대를 희망하려 한다
모든 것은 불안과 질투로부터 비롯되는가 그러므로 나는 기린의 목이 닿을 수 없는 높이가 되지 않기를 기원하고 세계는 그저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관계로 가득하기를 바랄 뿐이다
비가 온다면 당신과 우산을 쓸 텐데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최선을 다해 손을 잡으려 한다
그리하여 오늘 밤은 기린의 목이 충분히 길어지지 않는 내일 밤이고 헤어질 수 없는 연인들은 닿을 수 없는 저물녘의 침묵을 이제는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계간 『시인시대』 2019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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