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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 / 한 잎의 여자(女子) 1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女子), 그 한 잎의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女子)를 사랑했네. 여자(女子)만을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女子), 여자(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女子), 눈물 같은 여자(女子), 슬픔 같은 여자(女子), 병신(病身) 같은 여자(女子), 시집(詩集) 같은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女子), 그래서 불행한 여자(女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女子).
왕자가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 시인 / 한 잎의 여자 2
나는 사랑했네 한 여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여자, 남대문 시장에서 자주 스웨트를 사는 여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여자, 단이 트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여자, 라면이 먹고 싶다는 여자, 꿀빵이 먹고 싶다는 여자, 한 달에 한 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여자, 손발이 찬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레지어를 하는 여자.
가을에는 스웨트를 자주 걸치는 여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여자, 화가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여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여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여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여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여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여자, 더러 멍청해지는 여자, 그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여자.
오규원 시인 / 한 잎의 여자 3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여자,지금 창 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커피같은 여자,그레뉼같은 여자, 모카골드 같은 여자,창 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되네.오른쪽 엉덩이가 큰 여자,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여자, 봉투같은 여자.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잎 클로버 같은 여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여자.
내 사랑하는 여자, 지금 창 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여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여자, 바람에는 눕는 여자, 누우면 돌처럼 깜감한 여자, 창 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여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보여 주지 않는 여자, 앉으면 앉은, 서먼 선 여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여자, 그녀를 나는 사랑 했네.물푸레 나무 한잎처럼 쬐그만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 시인 / 허공과 구멍
나무가 있으면 허공은 나무가 됩니다 나무에 새가 와 앉으면 허공은 새가 앉은 나무가 됩니다 새가 날아가면 새가 앉았던 가지만 흔들리는 나무가 됩니다 새가 혼자 날면 허공은 새가 됩니다 새의 속도가 됩니다. 새가 지붕에 앉으면 새의 속도의 끝이 됩니다 허공은 새가 앉은 지붕이 됩니다 지붕 밑의 거미가 됩니다 거미줄에 날개 한쪽만 남은 잠자리가 됩니다 지붕 밑에 창이 있으면 허공은 창이 있는 집이 됩니다 방 안에 침대가 있으면 허공은 침대가 됩니다 침대 위에 남녀가 껴안고 있으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입술이 되고 가슴이 되고 사타구니가 됩니다 여자의 발가락이 되고 발톱이 되고 남자의 발바닥이 됩니다 삐걱이는 침대를 이탈한 나사못이 되고 침대 바퀴에 깔린 꼬불꼬불한 음모가 됩니다 침대 위의 벽에 시계가 있으면 시계가 되고 멈춘 시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허공은 사람이 되지 않고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되어 들어갈 관이 되고 뚜껑이 꽝 닫히는 소리가 되고 땅속이 되고 땅속에 묻혀서는 봉분이 됩니다 인부들이 일손을 털고 돌아가면 허공은 돌아가는 인부가 되어 뿔뿔이 흩어집니다 상주가 봉분을 떠나면 모지를 떠나는 상주가 됩니다 흩어져 있는 담배꽁초와 페트병과 신문지와 누구의 주머니에서 잘못 나온 구겨진 천원짜리와 부서진 각목과 함께 비로소 혼자만의 오롯한 봉분이 됩니다 얼마 후 새로 생긴 봉분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달라져 잠시 놀라는 뱀이 됩니다 뱀이 두리번거리며 봉분을 돌아서 돌틈의 어두운 구멍 속으로 사라지면 허공은 어두운 구멍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 앞에서 발을 멈춘 빛이 됩니다 어두운 구멍을 가까운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새가 됩니다.
오규원 시인 / 현황(現況) B
1
당신에게 외면당한 현실의 뒤뜰 구석에는 신(神)의 왼쪽 발 뒤꿈치가 적발(摘發)된다. 분실한 잠이 몇 송이 라일락꽃이 적발(摘發)되고 지붕 밑 서까래에서 낡은 돌쩌귀가 적발(摘發)된다.
당신의 책상서랍에는 우편요금에게 미안한 얼굴을 하고 봉투가 앉아 있다. 천사(天使)가 먹다 남긴 추억의 빵이 몇 조각. 그 옆에 새벽 2시의 음침한 불빛이 들어있다. 오오 묻지는 말게 그게 뭐냐고
2
시간의 육신(肉身)이 부서지고 있다. 들쥐가 갉아먹은 뜰이 조금씩 간격을 두고 분쟁(紛爭)을 제기하는 나무들이 어둠에 구멍을 뚫고 있다.
신경(神經)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오른쪽과 왼쪽에서 버려진 나의 깊은 우물속을 내려가는 빈 두레박 소리가 빠져나오고 발자국 큼직큼직한 악몽(惡夢)이 등뼈를 타고 넘어오고 있다.
3
오오 묻지는 말게 그게 뭐냐고, 수은주 속으로 창백한 미래가 기어오르고
바람이 의자 밑에서 쓰러진 시간의 뼈다귀를 추리고 있다. 백지(白紙)들이 마른 감정의 밑바닥을 핥고 낱말의 궁색한 표정을 창 밖의 풍경이 노려보고
내장(內臟)에 드러누운 불길한 환각(幻覺)을 반출하는 정맥(靜脈)의 발소리가 문지방을 밟고 말갛게 내부(內部)를 닦아낸 유리창을 통과하고 있다.
순례, 민음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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