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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 / 사물(事物)의 정다움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네. 구름나라와 은하수 사이의 우리의 어린이들을 꿈의 병신들을 잃어버리며 캄캄함의 혼란 또는 괴로움 사이로 인생은 새버리고, 헛되고 헛됨의 그 다음에서 우리는 화환과 알코올을 가을 바람을 나누며 헤어졌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고.
죽음이었지만 허나 구원은 또 항상 가장 가볍게 순간 가장 빠르게 왔으므로 그때 시간의 매(每)마디들은 번쩍이며 지나가는 게 보였네 보았네 대낮의 햇빛 속에서 웃고 있는 목장의 울타리 목간(木幹)의 타오르는 정다움을,
무의미하지 않은 달밤 달이 뜨는 우주의 참 부드러운 사건을. 어디로 갈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길과 취기(醉氣)를 뒤섞고 두 사람의 괴로움이 서로 따로 헤어져 있을 때도 알겠네 헤어짐의 정다움을.
불붙는 신경(神經)의 집을 위해 때때로 내가 밤에 깨물며 의지하는 붉은 사과, 또는 아직도 심심치 않은 오비드의 헤매는 침대의 노래 뚫을 수 없는 여러 운명의 크고 작은 입맛들을.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상처(傷處)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새벽의 피
아, 새벽 거리. 봤나? 그 속으로 지나왔지. 그 속으로? 차고 맑은 새벽의 피 속으로. 그렇지, 내 따뜻한 피를 섞었지. 내 몸 속의 한 줄기 파란 감각……새벽의 푸른 육체 속으로 뚫린 (나의 육체가 지나오면서 그린) 한 줄기 따듯한 구멍. 새벽은 아주 태연했어. 비정(非情)할 만큼. 아니 새벽은 아주 믿음직스러웠어. 믿을 수 있는 건 모든 서두르지 않는, 모든 태연한 것들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 차고 맑은 피 속에 네 따듯한 피를 섞어봐. 아 새벽 거리.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생명 만다라
어릴 때 참 많이도 본 나팔꽃 아침을 열고 이슬을 낳은 꽃 아침하늘의 메아리 이슬 맺힌 꽃 이슬에 비췬 꽃 만다라 무한반영(無限反映)의 꽃 만다라 피, 붉은 이슬 의 메아리, 그 메아리 속에 생명 만다라 눈동자 에 맺히는 이슬 그 이슬 속에 삶 만다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석탄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은 죽어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석탄을 캐내면서 우리는 묻힙니다. 우리를 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폐증이라지요? 그건 여러 병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약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기를 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캐내는 석탄만도 못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막장에 묻어주세요. 거기서 석탄이 되겠습니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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