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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사물(事物)의 정다움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5.

정현종 시인 / 사물(事物)의 정다움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네.

구름나라와 은하수 사이의

우리의 어린이들을

꿈의 병신들을 잃어버리며

캄캄함의 혼란 또는

괴로움 사이로 인생은 새버리고,

헛되고 헛됨의 그 다음에서

우리는 화환과 알코올을

가을 바람을 나누며 헤어졌네

의식의 맨 끝은 항상

죽음이었고.

 

죽음이었지만

허나 구원은 또 항상

가장 가볍게

순간 가장 빠르게 왔으므로

그때 시간의 매(每)마디들은 번쩍이며

지나가는 게 보였네

보았네 대낮의 햇빛 속에서

웃고 있는 목장의 울타리

목간(木幹)의 타오르는 정다움을,

 

무의미하지 않은 달밤 달이 뜨는

우주의 참 부드러운 사건을.

어디로 갈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길과 취기(醉氣)를 뒤섞고

두 사람의 괴로움이 서로 따로

헤어져 있을 때도

알겠네 헤어짐의 정다움을.

 

불붙는 신경(神經)의 집을 위해

때때로 내가 밤에 깨물며

의지하는 붉은 사과, 또는

아직도 심심치 않은

오비드의 헤매는 침대의 노래

뚫을 수 없는 여러 운명의

크고 작은 입맛들을.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상처(傷處)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病)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새벽의 피

 

 

아, 새벽 거리. 봤나? 그 속으로 지나왔지. 그 속으로? 차고 맑은 새벽의 피 속으로. 그렇지, 내 따뜻한 피를 섞었지. 내 몸 속의 한 줄기 파란 감각……새벽의 푸른 육체 속으로 뚫린 (나의 육체가 지나오면서 그린) 한 줄기 따듯한 구멍. 새벽은 아주 태연했어. 비정(非情)할 만큼. 아니 새벽은 아주 믿음직스러웠어. 믿을 수 있는 건 모든 서두르지 않는, 모든 태연한 것들이라고 생각될 만큼. 그 차고 맑은 피 속에 네 따듯한 피를 섞어봐. 아 새벽 거리.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생명 만다라

 

 

어릴 때 참 많이도 본

나팔꽃

아침을 열고

이슬을 낳은 꽃

아침하늘의 메아리

이슬 맺힌 꽃

이슬에 비췬 꽃 만다라

무한반영(無限反映)의 꽃 만다라

피, 붉은 이슬

의 메아리, 그

메아리 속에 생명 만다라

눈동자

에 맺히는 이슬

그 이슬 속에 삶 만다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 시인 / 석탄이 되겠습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은 죽어왔습니다, 문자 그대로.

석탄을 캐내면서

우리는 묻힙니다.

우리를 캐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진폐증이라지요?

그건 여러 병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약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기를 살기 시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캐내는 석탄만도 못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막장에 묻어주세요.

거기서 석탄이 되겠습니다.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섬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