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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일 시인 / 난로회(煖爐會) 1
1
떨리는 세계를 말하면서 황폐한 식탁의 무게 밑에 깔리운 지성. 성욕에 찬 새들은 노래를 부르고 재빠른, 누구나 할 것 없이 따라간 연대를 잔에 따르면서 성난 여인을 마시고 천(千)의 육체를 마시고 누워 버린 사람들. 피부에 솟아난 식욕과 오랜날을 찾아 헤매던 안타까운 사랑을 훔쳐간 모호한 이웃의 손들이여 친친 감겨 오는 시간, 움직일 수 없는 육체의 고요에서 그지없이 뜨거운 장소에서 벗어나라. 벗어나라, 황홀한 쟁투(爭鬪)여.
2
남루한 의식의 비탈을 내려가 본다 앉아 있는 여인. 겨울새는 옆에서 무수히 날으고 떠나간 남자들의 타다 남은 유혹. 난로가 흔들리면 부끄러웠던 과오들. 일렁이는 화기(火器)에서 죽어간 젊은 시간들. 여인의 빈틈없는 피부에 걸려 있는 잔인한 별가(別歌)여, 흐느끼는 외로운 즈로즈여.
3
이 아침의 늦어 버린 기상(起床). 눈을 뜨면 황금의 환상(幻想)들 여인은 머리를 빗으면서 엉킨 시간들을 빗으면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지.
어느 때이고 출렁여 오는 망각의 아래 아래, 퍼져 버리는 노래. 밤새 매달린 창변(窓邊)의 음성들. 저쪽에서 비척거리는 아침이 오고 태양 아래 비껴가는 시간들.
떠나가게 하라 저 광휘(光輝)의 빗발치는 곳에 나는 나를 눕히게 하라.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난로회(煖爐會) 2
우리들의 방은 음악이었다. 기어드는 햇살을 막고 낮은 음정(音程)으로 펄럭이는 커튼. 음악의 골짜기마다 아로새겨진 발가벗은 도덕과 괴로와하는 육체의 혁명은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두려운걸요. -당신의 노란 스카프가 좋군. 세계는 어느덧 우리들의 팔다리에서 타오르고 몇 권의 서적들은, 저기 저렇게 박수를 치면서 맹목(盲目)의 진리를 잡아먹고 있었다. 잡아먹고 있었다. 한 잔의 커피와 진한 입술의 겨울날 사실, 젊은 연인들은 휘파람을 불면서 난로곁을 비껴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방은 나체였다. 창가에서 시간은 부끄러운 듯 멈춰 있고 나는 여러 번 동안이나 미쳐 있고 눈이 내리는 방의 어느 곳에서나 혁명은 일어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막연히 나부끼는 인민들의 어디에서나 쌈 싸우는 주택들의 어디에서나 미워하는 것들이 있었다. 어린 문장들이 나의 육체를 감쌀 때 드디어 나는, 사랑을 배웠었다.
육체의 모호한 부분을 기어다니는 음악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위태로이 걸려 있고 신(神)은 귓전을 기어다니다가 당신의 피부색만큼 짙어지고 한모금 담배연기 속에서 나는 당신의 지혜 속에 묻혀 있었다.
우리들의 이마와, 입술의 어디쯤일까 시간은 발가벗었고. ―눈이 내린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미칠 수 있어요, 저 눈보라처럼. -암, 미쳐야지. 미쳐야지. 내의마다, 불안한 신(神)들은 눈을 뜨고 어머니들은 추운 겨울날 나와 당신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아아 시(詩)가 하이얗게 흩날리는 겨울거리, 나는 사랑의 독재자였다.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내가 뿌리는 씨앗은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다. 이 고요하고 고요한 시간에 가릴 것은 가리고, 버릴 것은 버려야지.
사람아, 사람아, 떠나가라. 나로부터 떠나가라. 내가 딛는 땅도 내가 받는 밥상도 떠나가라 떠나가라.
그리하여 혼만 남고 내 육체도 내가 걸치는 옷도 땀도 때도 손톱도 발톱도 털도 떠나가라.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지평(地平)의 저 넘치는 뜨락에는 마음놓고 뿌릴 수 있는 품종(品種)이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산간벽지 호젓한 개울물로 씻은 내 혼의 씨앗이어라.
사람아 사람아 모든 맹렬한 싸움은 끝났지만 최후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남아 있다.
아아! 그것은 죽는 일인데 죽어서 다시 깨어나는 일인데 아아! 그것은 씨앗을 뿌리는 일인데 우리들은 아직 혼을 찾지 못했는데
산과 하늘이 마주 닿는 저 파아란 지평(地平)과 뜨락만 넘쳐나네라.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조태일 시인 /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대낮에 아무리 보아도 태양은 하나니깐 하나로 보인다. 한밤에 아무리 보아도 달은 하나니깐 하나로 보인다.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배웠거니와 한반도는 끝끝내 하나인데 동서(東西)에서 보기엔 둘로 보였다.
생각하니 북순(北順)아, 억울해 죽겠다 곰곰히 생각하니 남순(南順)아 억울해 죽겠다 죽어죽어 생각해도 억울하겠다. 북남(北男)아 억울하다 생각하니 더 억울하다 남남(南男)아
꽹과리․징․장구․소구․벅구 들고 나와 모두 보라고 더덩실 더덩덩실 더어더엉실 억울하다 생각하니 살겠다. 춤춘다.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하늘더러 보라고 살빛을 보이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강물더러 보라고 눈물을 합치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바람더러 보라고 숨결 합치고 너만 하나냐? 우리도 하나다 물더러 보라고 핏줄 출렁이며 모두 보라고 모두 보라고 더덩실 더덩덩실 더어더엉실 춤춘다.
국토, 창작과비평사,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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